페르소나 persona - 시와 단상

  가면에 가면을 쓰면 위선이 선이 되는 세상       가면이 가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나만 맨 얼굴이긴 억울한 세상      얼굴 없는 얼굴들의 가면무도회에      슬픔과 연민이 기른 가면 없는 사람들      가면의 고장 베니스 쇼윈도마다 걸린 수많은 얼굴       어쩌자고 이 동네는 가면이 이리도 많나       인생은 가면놀이 나는 어떤 가면을 써야 하나       차가운 은빛 저 미소 뒤에 숨어       나는 이제 맘껏 울 수도 있으리라            자신의 인생에 가면을 씌운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다 - 시와 단상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가 되면 강들은 자신의 이름도 버리고 자신의 소유도 버리고 결국 하나가 된다       자연 안에서 우주 안에서 하나 안에서 바다 안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따로 없다       바다는 얼마나 평온한가 그곳에는 다툼도 갈등도 죽음도 자신의 이름도 없다      포말이 되어 파도는 사라져도 바다는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다       우리들 각각의 존재는 얼마나 미약한가 강의 삶은 얼마나 고달픈가 장마 지면 넘치고 가뭄 들면 곧 말라 하루도 근심 걱정 벗을 날 없으니       더해도 덧붙여지지 않고 덜어도 적어지지 않는 그 의연한 바다       우리는 강이 아닌 바다가 되어야 한다 바다는 하나이고 사랑이다      장자는 말한다.      “배를 골짜기에 감춰 두고 어살을 못 속에 감춰 두면 든든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밤중에 힘 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는 것인데, 어리석은 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크고 작은 것을 감추어 두는 데에는 적당한 곳이 있겠지만, 그래도 딴 곳에 옮겨질 곳이 있는 것이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두면 옮겨질 곳이 있을 수가 없는데, 이것이 영원한 만물의 위대한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물건이 딴 곳으로 옮겨갈 수 없이 모두가 존재하는 경지에 노니는 것이다.”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장자》, 연암서가, 2010.>      다음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이다.      “바다 위 파도에는 시작과 끝, 즉 생과 사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등대 - 시와 단상

  바다와 가장 가까이 닿은 육지의 끝 그 육지에서 어두운 밤바다에 보내는 여리고 연약한 연민의 촛대 하나      어느 해안 절벽 외진 구석에 외로이 홀로 선 망부석처럼       하얀 치마 곱게 차려입고 저 먼 바다만을 향하여 발돋움하다 흰 갈매기 화관 머리에 얹고 영원히 돌이 되어버린 고독한 여인의 석상       칠흑같은 밤바다에 홀로 빛나며 외로이 떠 있는 나그네에게 보내는 최초의 손길      기약 없이 보낸 누군가를 기약 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항상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고만 있는 사랑

파도 - 시와 단상

  오늘도 해안가 절벽에 끊임없이 부딪혀 구멍을 내놓는 저 파도는 수많은 문명에 구멍을 내놓았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작은 모래알로 남을 때까지 쉬지 않는 저 쉼 없고 시간보다도 더 단조로운 운동은 권태보다도 무섭고 눈물겹구나       해안가 조개 줍는 아이의 추억도 해변에 남겨진 연인들의 발자국도 모래 알갱이들로 부서진 문명으로 다시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의 웃음도       파도는 오늘의 전리품으로 저녁나절 붉은 석양의 황금 보따리에 담아 바다로 가져가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문명과 이야기 너와 나와의 그 짧은 해안가의 사랑도 파도의 전리품으로 영원히 바닷가 한 알 모래알로 남겠지 인생무상

큐피드의 화살 - 시와 단상

  연정이 떠나 깊이 패인 자리에 속살이 자라기까지 시간을 약으로 쓰라고 건네준 어떻게든 상처는 아물기 마련이라는 친구의 말에 상처 입은 사슴처럼 깊은 산중에 몸을 숨기고 나을 것 같지 않은 상처를 혀로 핥아가며  냄새를 지우고 내려온 냇가에  사냥꾼의 화살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내려온 한순간을 틈타 화살을 맞은 자리엔 언제나 새살이 돋았지만 그곳의 털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사랑의 자리는 상처 입고, 아물고, 다시 상처 입는 자리     

선악과善惡果 - 시와 단상

  아이들은 아직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       좀 더 이른 시기에 따는 아이도 있을 것이고 보고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도 있을 테지만...       하지만 적당한 때가 오면 부모는 권할 것이다      눈부신 여름 햇살에 눈물겨워 눈을 찡그리고 섰는 아이의 등 뒤에서 달래듯이 부르며      냇가에서 온종일 물고기만 쫓는 아이의 작은 손에 선과 악을 구분하고, 너와 나를 구분하면서  동심을 잃게 되는 때가 온다     

연어 - 시와 단상

  그리움은 언제나 과거에 사는 것 지나온 물길 이제 그리움 되어 저 먼 곳 뒤편에서  나를 부른다       연어가 물결을 거슬러 오르는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것 큰 바다로 나가기 위해 겪었던 시련과 비늘에 배어버린 상처마저 그리움 되어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기억의 처음에 다다른 연어들은 그곳에 새로운 그리움들을 잉태시킨다 그들은 부화되어 다시금 먼바다로 길을 떠날 것이다      그 여정은 단지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일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아직 모른다 결국은 동심으로 돌아가야 할 연어와 같은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