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 시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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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터인가 말없이 시인들의 방에 나타나 윗목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다가도 몇 잔 술에 다변多辯해지며 청포도와 광야를 격정적으로 암송하던
그러다가 다시 어느 날 말없이 사라져 버린 시인
가난한 시인들과 민족을 사랑하여
광활한 광야에 홀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광복 후에야 북경 감옥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으로 다시 나타난 사람
윗목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었던 그를 기억한 시인들 몇이 그의 시를 모아 육사 시집을 내다
우리가 잘 아는 시인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의열단 등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청포도」, 「절정」, 「광야」등으로 잘 알려진 저항시인 이육사. 그의 시들을 보면 거칠고 강렬한 혁명가의 모습이 자연히 떠오른다. 하지만 그의 인생을 보면 강한 반전이 있다.

이육사 출처 http://www.264.or.kr
청마 유치환 시인의 수필집에 나오는 육사의 모습은 그리 강인하지도 굳센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을 바로 앞두고 죽은 육사의 시를 해방 후에나 접해본 유치환 시인은 유약한 시인이 썼다고는 볼 수 없는 시들을 보고는 많이 놀라게 된다.
다음은 유치환 시인이 쓴 수필의 한 부분이다.
저항자와 시
“나의 희미한 기억의 망막에 흡사 필름의 한 토막을 들고 비쳐보듯 이상하게 환한 그림자를 남겨 두고 본체는 없어진 두 시인이 있다. 그 하나는 이상(李箱)이요, 다른 하나는 육사(陸史)인 것이다.
1930년대의 말기! 우리 민족 위기에 마치 그것이 운명이나처럼 질곡(桎梏)하고 있던 일제의 폭력이 그들의 방자한 야망이 뻗치는 대로 자신의 붕괴를 조심한 힘에 겨울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더욱더 그 폭력성을 더하던 그 시기에 있어서 참으로 옳은 우리의 양심들은 얼마나 찢기고 불지짐을 당하였던가. 그때의 숨 막히고 암담한 어둠을 피하여 갈 길만 있었다면 누구나가 다 조국의 하늘을 버리고 사산(四散)하였으리라.
그 길이 이상이 다시 돌아오지 못할 고국을 떠나는 마지막 길이었다.
눈이라기보다 버꿈한 안와(眼窩), 커다랗게 웃는 웃음이 웃음이라기보다 무섭기까지 한 까마귀의 화신 같은 역설적인 그 모습으로서 손에 든 것 하나 없이 표연히 부산 초량의 나의 우거(寓居)에 나타나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역전의 한 여인숙에서 취하여 같이 하룻밤을 자고는 다음 아침 연락선으로 일본으로 떠나보낸 그 길이 이상의 마지막 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육사가 중국으로 갔음을 나는 몰랐다. 내가 북만주로 가버린 후였으므로. 그리고 그가 북경에서 옥사(獄死) 한 것을 안 것도 내가 귀국한 해방 후였다.
엷은 색안경으로 눈 언저리가 불그레 보이고 샌님같이 생긴 작은 체구의 육사는 술을 먹으면 더욱 다변(多辯)하고 즐거워지는 것이었다. 어디서 마셨던지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을 둘이 서로 어깨 끼고 걸어오는 밤이었다. 剪爪記(손톱을 깎음)란 수필 한 편을 썼다고 육사가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 말을 들으며 육사가 씀직한 제목이며, 또 누구나가 쓸 수 있는 재료가 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손톱보다 발톱을 깎는 편이 더욱 철학미적(哲學味的)이요, 원시성을 띠어서 좋겠다고 생각하고 아마 육사는 손톱편이리라고 혼자 생각을 자행(恣行)한 것이다.
육사의 작품은 다분히 그의 교양과 취미에서 이룩된 것이었다. 천상 문학밖에 못하는 그러한 류(類)의 시인은 육사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그의 재질의 일부라고 나는 느끼고 왔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에 남긴 광야와 꽃 두 작품을 대하고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육사가 무슨 다른 사람처럼 변모하여 거기 막아서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어떠한 표면적인 연유로써 그 당시 육사가 중국으로 갔었는지를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연유이고 간에 그 연유의 이면에는 그 시기의 질식하고야 말 하늘을 피하여 대륙으로 건너갔음에 틀림없었을 것임을 쉬이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샌님 같고 재사적(才士的)인 타입의 성격이 한 번 생명에의 무도(無道)한 위협에 항거하고 일어설 때 비로소 비 한 방울 내리잖는 때에도 빨갛게 피는 자신의 목숨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차마 그것은 범하지 못하리라고 자경(自警)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각설하고 이상이 동경서 유치장(留置場) 탓으로 죽고 육사가 북경서 옥사하고, 또 동주(東住)도 옥사하고, 이렇게 일제 말엽 좋은 시인들만이 꺾여지고 나와 같은 노마(駑馬)만이 아직 남아 살아 있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새삼스리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남송우 엮음, 《청마 유치환 전집》, 국학자료원, 2008.
다음은 김광균 시인이 본 이육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육사의 이야기는 8.15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8~9년경으로 생각되는데, 박태원의 '천변풍경'에 등장하던 다동 시냇가에 내 친구가 살고 있었다. 김관이라는 음악평론가로, 그가 가끔 조선일보에 외국 음악의 움직임을 소개하고 음악회 평도 쓰던 무렵, 그는 처갓집 사랑채에 방 하나를 서재로 쓰고 우리는 매일 그곳에 모여 놀았다. 그 친구들 사이에 어느 날 육사가 끼기 시작했다. 육사는 그로부터 개근하는 편이었는데, 우리들은 사실 처음에는 육사가 끼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이었는지 지금 기억이 삭막하나 처음 육사를 만났을 적에 그는 "나 육사요" 하고 악수를 청한 다음에는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키는 중키에 안경을 쓰고 약간 마른 편이나 행색이 과히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육사 자신은 이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과묵한 사람이어서 친구들 이야기에 들이 파는 일도 없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늘 웃고 있었다. 그러던 사람이 술이 들어가면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다변多辯하여지고 문학담에 열중하는가 하면 갑자기 일어서서 자기 시를 낭송하는 것이다. 즐겨 부르던 시 중에 '청포도'와 '광야'가 있고, 이 시를 부를 때의 언조는 매우 격렬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우리는 술도 매일 마시고, 동인지도 하고, 세상 불평도 해가며 몇 해를 함께 뒹굴었다. 그러던 육사가 하루아침에 소리도 없이 우리들 사이에서 사라졌다.
우리들이 그를 만나고 헤어진 사이에 그가 걸어온 길이 무엇이고, 가족은 몇이 되고,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몰랐고, 서로 문답할 생각도 안 했다. 그가 일정 말기에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 투쟁을 하다 북경 감옥에서 객사하였다는 것을 안 것은 8.15도 한참 후였는데,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하고, 무슨 일로 객사하였는지 지금도 자세한 것을 모르고 있다. 8.15 얼마 후에 우리는 그의 와보臥報를 듣고, 신석초, 오장환, 이용악, 김광균이 모여 '육사시집'을 엮어냈다. 서문은 내가 쓰고, 그의 동생 이원조가 애절한 발기拔記를 쓰고, 말미에 방루근기放淚謹記라고 써서 서결을 질렀다.
오영식 유성호 엮음, 《김광균 문학전집》소명출판, 2014.
어느 시대에나 그렇듯이 감옥에 가는 이유는 딱 두 가지이다. 나의 입신양명을 위해 가거나 남을 위해 가거나.
본명은 이활.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264번. 그가 이 번호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이유는 자신의 신념에 당당했기 때문이다. 유치환 시인과 김광균 시인의 글에서 보듯이 그는 문학과 시를 그리고 이웃을 사랑한 평범하고 수줍은 한 인간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그의 용기와 희생은 보잘것없고 미미하고도 가난한 노래의 씨일 뿐이지만, 미래에 화려하게 피어날지 모르는 소중한 희망인 것이다.
무엇이 그를 광야로 보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게 했는가. 정의와 민족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이다.
희생의 가치는 한 알의 도토리가 땅에 묻혀 키워낸 거대한 떡갈나무와 같은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다. 육체는 죽을 수 있으나 정신은 영원히 산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다. 인을 위해, 사랑을 위해, 인류를 위해, 나의 고통을 바쳐 세상을 구하는 것,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는 것이다. 대신하는 것이 희생이다.
다음은 요한복음(12:23-25)에 나오는 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장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기름은 촛불이 되어 타 없어져 버리지만, 불은 옮겨 붙여 주면 다할 줄 모르게 된다.”
<장자 지음, 김학주 옮김, 《장자》, 연암서가, 2010.>
여기서 기름은 희생 없는 개개인의 삶을 말하고, 불을 옮겨 주는 행위가 희생인 것이다. 희생이란 꺼지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며, 점점 세상에 퍼져 세상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정신인 것이다.
희생을 성경식으로 정의하자면, 믿음을 통해 뿌려진 한 알의 밀알 그 죽음으로 얻어진 영원한 삶일 것이다.
어떻게 확고한 믿음을 얻어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을 땅에 묻을 수 있는가.
다음의 글에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식이 귀여운 자는 그 자식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하는 자는 그 몸을 사랑하며 공적을 귀하게 여기는 자는 그 일을 사랑한다. 사랑이 깊은 자모는 어린 자식이 행복해지도록 힘쓰고 행복해지도록 힘쓰면 화를 물리치는 일을 하게 되고 화를 물리치는 일을 하게 되면 사려가 깊어지고 사려가 깊어지면 사리를 알게 되고 사리를 알게 되면 반드시 성공을 거두고 반드시 성공을 거두면 일을 실행할 때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 것을 가리켜 용기라고 한다. 성인이 모든 일에 대처하는 것도 모두 자모가 어린 자식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반드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도를 찾아낸다. 반드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도를 찾아내면 (사리에) 밝아지고 그 일에 종사할 때 역시 망설이지 않는다. 망설이지 않는 것을 가리켜 용기라고 한다. 망설이지 않는 것은 자애로부터 생긴다. 그러므로 노자에 말하기를 ‘자애롭기 때문에 능히 용감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비 저, 이운구 역, 《한비자 1-2》, 한길사, 2002.>
희생은 확고한 자기 신념에서 나온다. 사랑은 신념을 낳고, 확고한 신념은 두려움 없는 용기를 낳고, 그 용기가 망설임 없이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데 이를 희생이라 하는 것이다.
희생은 결국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위에서 ‘반드시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도’라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희생인 것이다. 그래서 희생의 순간에는 망설임이 없는 것이다.
예수가 망설임 없이 십자가를 졌고, 소크라테스는 망설임 없이 사약을 들이켰으며, 체게바라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기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들의 희생이 사랑을 낳고, 영원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고,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그들의 죽음은 세상 곳곳에 많은 열매를 맺었고, 아직도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으며, 계속 살아갈 것이다.
육사와 체 게바라와 같은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지행합일형 인간이었다. 정의로운 인간이었다. 행동하는 지성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한다.
“행위라는 것은 정신적, 신체적, 영적 활동을 모두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며, 그렇지 않고서는 희생은 있을 수 없고, 희생 없이는 구원은 없다. 이것을 알고, 그 앎을 실행하는 것이 희생의 비밀을 아는 일이다. 지능만을 쓰고 육체를 아끼는 사람은 완전한 희생을 바친 것이 못된다. 마음과 몸과 영혼을 합해서 쓰지 않으면 그것들은 인류를 위해 옳게 봉사할 수가 없다.”

Mahatma Gandhi,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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