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누가 가난한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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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더 자유롭다는 것을 아는가.
유베날리스는 말한다.
“무일푼인 여행자는 노상강도를 상대로 노래도 부를 수 있다. 신에게 제발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짓은 그만둬라. 너는 가난뱅이가 되어야만 알 수 있는 홀가분함을 잊었는가?”
<북타임 엮음, 《그리스 로마 명언집》, 북타임, 2009.>
고대 그리스의 현자 비아스는 말한다.
“나의 모든 것은 몸과 함께 걸어다닌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저, 전양범 역, 《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2008.>
다음은 ‘법구경’에 나오는 말이다.
“깨어난 자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호수를 버리고 날아오르는 백조처럼
그들은 공중으로 날아올라 보이지 않는 길을 떠난다.
아무 것도 갖지 않고, 아무 것도 모으지 않은 채
그들은 지식을 먹으며 허공중에 산다.
그들은 자유롭게 되는 법을 알았다.”
<오쇼 라즈니쉬 지음, 손민규 옮김, 《법구경》, 태일출판사, 2002.>
성경은 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하는가.
내일을 미리 예비(미리 준비)함 없는 절제된 가난은, 두려워할 일 없이 오늘의 걱정을 오늘에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란 타인에 대한 베풂과 사랑으로 가난을 받아들일 줄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일용할 양식에 감사할 줄 알며, 그날에 남는 것은 쌓아두지 않고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다. 자신을 세계의 시민으로 인식하는 사람이며, 인(仁)한 사람이며, 자비로운 사람이며, 나와 남은 하나임을 알고 우주와 자연의 법칙을 아는 사람이며, 정의가 기능하는 사람이다.
또한 절제의 가치를 알고, 돈보다는 시간을 버는 사람이며, 그리하여 자유로운 사람이다.
사실은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다.
당연히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쉼 없이 내일을 걱정하여 쌓아두는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자들이며,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다.
그 쉼 없는 걱정은 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한다.
마태복음(6:24-34)은 말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니라.”
위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재물을 귀히 여겨 사욕에 빠지면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다투게 될 것이니,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부(富)가 의(義)를 해친다고 본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반대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섬긴다면 재물을 위해 사람들과 다툴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재물은 동시에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면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재물이 없으면(경쟁하지 않으면, 다투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할 텐데, 하늘이 키울 것이니 사욕을 버리고 내일을 걱정하면서 오늘을 살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하늘이 키운다는 것은, 하늘이 준 대지의 선물을 사랑으로 서로 나눈다면 넉넉할 것이라는 비유일 것이다.
사랑 안에서는 모두가 살 수 있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는 인간처럼 수고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고 대지를 옷으로 입고 살아도 솔로몬의 화려한 옷보다 낫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삶은 남과 나를 하나로 볼 수 있는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또 다른 나에게 베푸는 것은 결국 나에게 베푸는 것이기에 나에게는 더하고 덜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제로섬(zero-sum)이다. 결국 얻거나 잃을 것이 없다. 총계는 똑같아진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했다. 이 진리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니라.”
이 부분을 잘 살펴보자.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란 우리가 늘 하는 걱정인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인간이 태어날 때 제 먹을 복은 타고 난다고 말한다.(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늘이 의롭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민,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곁들여 같이 받게 될 것이라 말한다.
모두가 하나임을 알고 사랑으로 나누면 결국 부족할 것 없이, 두려워할 것 없이 모두가 같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은 우주와 자연의 힘이다.
이에 대한 칼릴 지브란의 뛰어난 비유를 보자.
“풍요와 만족은 대지의 선물을 서로 잘 교환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교환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어떤 자를 탐욕으로,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 뿐......
그러므로 그대들이 장터를 떠나기 전에 보라,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가 없는가를.
대지를 주관하는 영은 그대들 중 지극히 작은 자의 필요까지 다 채우기 전에는 바람 위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한다......
그대가 가진 것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주는 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줄 때이다.
그대가 가진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일 부족할 것을 염려해 간직하고 지키는 것일 뿐.
또 내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순례자들을 따라 성지를 다니며 흔적도 없는 모래밭에 뼈다귀를 묻어 두는 겁 많은 개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부족할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이미 부족함이 아닌가?
집에 우물이 가득 찼어도 목마를까 봐 두려워한다면, 그 목마름은 영원히 채울 길이 없다.”
<칼릴 지브란 저, 류시화 옮김, 《예언자》, 무소의뿔, 2018.>
그날 그날의 양식(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이에게는 그날 그날의 걱정으로 족한 것이다. 일용할 양식으로 산다는 것은 풍요로운 대지의 선물을 서로 잘 교환하는 것이며, 이 교환은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자를 두려움에서 오는 탐욕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며, 그로인하여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다.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를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라 했다.
진정 가난한 자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탐욕스런 사람이며, 내일의 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창고에 곡식을 가득 채워 둔 사람이다.
가난은 빈곤한 정신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정신이 빈곤하지 않다면 절대 가난해질 일이 없다.
우리는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와 공자의 제자 안회를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는 이덕무, 정약용등 물질적으로는 부족하나 절대 가난하지 않았던 선비들이 많이 있었다.
지혜만 먹고도 배부른 사람들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나 공자의 제자인 안회, 우리의 가난한 선비들이 그러했다.
세상에 금수저나 흙수저란 따로 없다. 알렉산더 대왕은 금수저고, 디오게네스는 흙수저란 말인가. 디오게네스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알렉산더 역시 마찬가지였다.
디오게네스를 키니코스학파라 하는데, 견유학파란 뜻이다. 키니코스, 견유는 ‘개’를 의미한다. 이는 이러한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단 한 벌의 옷만 걸친 채, 평생을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던 디오게네스는 어느 날 개 한 마리가 혀로 물 마시는 것을 보고는 개도 저렇게 마시는데 표주박이 왜 필요하냐며, 그가 가진 마지막 재산인 표주박마저도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도 한다.
표주박마저도 버렸던 그가 스스로를 흙수저라 생각했을 리는 없겠다.
견유학파의 시초는 소크라테스 제자인 안티스테네스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내가 배고프지 않을 만큼, 목마르지 않을 만큼 가졌다. 벗지 않을 만큼 입었다. 밖에 있을 때는 저 부자 칼리아스보다도 더 떨지 않고 안락하다. 안에 있을 때는 따듯한데 왜 옷이 필요한가?”
<위키백과, <키니코스학파>, <안티스테네스>>
공자가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 안회는 평생 술지게미나 쌀겨 같은 거친 음식조차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 했지만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학문에 힘썼다. 이런 안회를 보고 공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다음은 그의 제자 안회에 대한 공자의 말이다.
“어질구나,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마을에 살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거늘,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논어)
보통 사람들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가난 속에서, 물에 밥을 말아 먹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에 매진했던 안회.
그는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마을에 사는 것을, 그 가난 자체를 즐거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즐겼던 학문에의 도를 추구하는 삶을, 가난을 걱정하고 벗으려는 노력과 바꾸지 않았을 뿐이다.
안회가 젊은 나이로 죽었을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亡我)”라며 대성통곡한다.
조선의 책벌레 유학자 이덕무는 가난한 선비의 대명사였다.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이덕무 청언소품’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덕무의 집은 겨울에 몹시 추워 입김을 불면 방안에 성에가 생길 정도여서, 한밤의 추위에 일어나 ‘한서’라는 책 한 질을 이불 위에 덮고 ‘논어’를 병풍처럼 막아 놓고 눕지 않았으면 얼어 죽었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는 가난을 꺼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가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가장 으뜸은 가난을 편안히 여기는 것이다. 그 다음은 가난을 잊는 것이다. 가장 낮은 생각은 가난을 꺼리고, 가난을 호소하며, 가난에 눌려 가난에 부림을 당하는 것이다. 또 가장 최악인 것은 가난을 원수처럼 미워하다가 가난에 죽는 것이다.”
<정민 저,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이덕무 청언소품》, 열림원, 2018.>
다음은 가난과 부에 관한 현인들의 생각이다.
“가난은 부의 감소가 아니라 탐욕의 증가에 있다.”(플라톤)
<플라톤 저, 천병희 역, 《법률》, 숲, 2016.>
“부유한 자가 품고 있는 가난은 가장 무서운 빈곤이다.”
(세네카)
<몽테뉴 저, 손우성 역, 《몽테뉴 수상록》, 동서문화사, 2007.>
“만족을 아는 것이 가장 부자.”(법구경)
“물건이 남아돌면 부(富)라고 하는데, 이러한 부를 바라는 마음이 곧 빈(貧)이다. 물건이 부족하면 빈이라고 하는데, 이 빈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부다. 부귀는 마음속에 있지 재물에 있지 않다.”(사토 잇사이)
<사토 잇사이 저, 노만수 역, 《언지록》, 알렙, 2017.>
“부귀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면 부귀를 누리지 않아야 한다. 빈천은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면 버리지 않아야 한다. 군자는 의(義)에 기뻐하고, 소인은 이익에 기뻐한다.”(논어)
<시부사와 에이치 저, 노만수 역, 《논어와 주판》, 페이퍼로드, 2009.>
“인생에는 돈도, 쾌적한 주거도, 건강하고 풍성한 식사도 필요하다. 그것들을 손에 넣음으로써 사람은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소유가 도를 넘으면 사람은 180도 돌변하여 소유욕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소유하기 위해서 인생을 소비하고 휴식 시간까지 구속당하며, 조직에 조종당하고 끝내는 국가의 구속까지 받게 된다. 인생이란 것이 끝없이 많이 소유하는 경쟁을 위해서 주어진 시간일 리 없다.”(니체)
<프리드리히 니체 저, 시라토리 하루히코 엮음, 박재현 옮김, 《니체의 말》, 삼호미디어, 2013.>
사람에게는 털이나 깃이 없다. 옷을 입지 않으면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위로 하늘에 매달려 있지 못하고 아래로 땅에 붙어 있지 못하여 장과 위를 뿌리로 삼아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이득을 보려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득 보려는 마음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이 사람 몸의 근심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옷이 충분히 추위를 견딜 수 있고 음식이 충분히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다면 근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크게는 제후가 되고 작게는 천금이나 되는 재산을 남기더라도 이득 보려는 근심을 물리칠 수 없다. 죄수들도 혹 형을 면제받고 죽을 죄도 때로는 살릴 수 있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자의 근심은 평생토록 풀려날 수 없다. 그러므로 노자에 말하기를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한비자)
<한비 저, 이운구 역, 《한비자 1-2》, 한길사, 2002.>
양주가 말했다.
“원헌(原憲)은 노나라에서 가난에 찌들었지만, 자공은 위나라에서 재물을 늘렸다. 원헌의 가난함은 삶을 손상시켰고, 자공의 재산 증식은 몸을 망가뜨렸다.”
다른 사람이 물었다.
“그렇다면 가난한 것도 좋지 않고 재물을 늘리는 것도 좋지 않다는 것이로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양주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삶을 즐기고 몸을 편안히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삶을 즐기는 자는 가난하지 않고 몸을 편안히 하는 자는 재물을 불리지 않는다.”(열자)
<열어구 저, 정유선 옮김, 《열자: 조화로운 삶이란 무엇인가》, 동아일보사, 2016.>
“우리는 가지지 못한 고통이 잃는 고통보다 훨씬 덜하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네. 그러면 잃을 것이 더 적은 가난이 덜 괴로울 것이네. 부자가 손실을 더 의연하게 참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착각일세. 상처에서 느끼는 고통은 몸집이 크나 작으나 매일반이니까 말일세. 돈을 잃는 것보다는 벌지 않는 것이 더 견딜만하고 수월하다네. 그래서 자네는 행운에게 버림받은 사람들 보다는 행운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더 즐거워하는 것을 보게 될 걸세.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인 디오게네스는 이런 점을 보면서 자기로부터 아무것도 빼앗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네. 그대가 누구든 부만 보면 얼이 빠지는 자여,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 우주를 보라! 그대는 신들이 무일푼이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무엇이든 다 주는 것을 보게 되리라. 그대는 우연의 선물을 모두 벗어 버린 사람을 가난하다고 여기는가, 아니면 불사신과 비슷하다고 여기는가? 디오게네스는 하나 밖에 없는 노예가 도망쳤다는 보고를 들으면서 그를 도로 데려오는 것을 별로 보람 있는 일로 여기지 않았네. “마네스는 디오게네스 없이 살 수 있다는데, 디오게네스가 마네스 없이 살 수 없다면야 창피한 일이지”라고 그는 말했네. 내가 보기에 그의 말은 이런 뜻인 것 같네. “운명이여, 네 할 일이나 해라. 너는 디오게네스에게는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내 노예가 달아났다고? 그가 달아남으로써 실제로 해방된 것은 나란 말이야. 디오게네스 같은 힘이 없는 우리로서는 운명의 타격에 덜 노출되도록 우리의 재물을 줄이기라도 해야 하네. 돈도 가난으로 영락하지도 않고 가난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정도가 가장 이상적인 금액일세. 우리가 먼저 절약을 몸에 익혔다면 그런 금액으로도 만족할 것이네. 절약 없이는 어떤 재물이 와도 충분하지 않고, 절약하면 어떤 재물로도 충분하다네. 한 가지 수단만 있다면 말일세. 검소하게 생활하면 가난자체가 부로 변할 수 있다는 것 말일세. 우리는 부를 행운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서 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네. 인생의 다양하고 음험한 재앙을 다 물리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래서 돛을 활짝 펴는 사람은 폭풍을 만나게 마련이라네. 운명의 화살이 빗나가게 하려면 활동 범위를 줄여야 하네. 그래서 가끔 추방과 재앙이 결과적으로 약이 되고, 작은 피해로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네.”
(세네카)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저, 천병희 역, 《인생이 왜 짧은가》, 숲, 2005.>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다.
다음은 ‘도덕경’의 내용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같이 어울릴 때에는 아주 인자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고 발라서 잘 다스려지고, 일에는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춘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물은 낮은 곳에 임하며,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가길 꺼리는 곳에도 편안히 머무는 덕을 가지고 있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했다.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교훈이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같은 것이 아닐까?
다음은 나의 시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가난하다고 무시하지 마라
다투려 하지 않는 사람이다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면은 그만큼 강한 사람이다
미소 맑다고 가식적이라 생각 마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
그는 겸손한 사람이다
저리 환하게 사심 없이 미소 지을 수 있는 건
그가 가난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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