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들 - 시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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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고 빛바랜 것들을 좋아한다
언제 입어도 편한 물 빠진 청바지
오래된 고대 도시의 벽화
세월의 빗물에 보드랍게 닳아빠진 오래된 석탑
여행지 어느 뒷골목 페인트 벗겨진 낮은 담장과 대문들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들은 순하고 바르고 정靜해서
내가 사랑하고 연민하는 오래된 것들과 닮아서
빛바랜 흑백 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정겹고 따스하여
절로 고개를 숙이고 눈인사라도 실컷 했으면 좋을 사람들
살아온 세월처럼 색깔 잃은 추억처럼
발목 위로 닳아 올라간 옷은
수수한 미소처럼 정갈하고 가식이 없어
정겹게 드러난 건강한 살결 위로 햇살이 곱고 따스하다
백석의 시 하나를 소개한다.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선우: 반찬 친구
* 나조반 : 책상처럼 생긴 큰 상
* 세괏은 : '성질이나 기가 센'이란 뜻의 평북 방언
*제목의 의미: ‘선우’는 반찬을 의미하기에,
이는 ‘반찬친구에 대한 글’이라는 의미이다.
가재미는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모래사장)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었고”, 흰 쌀밥이 된 벼는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뜸부깃과의 새. 주로 호숫가나 초습지의 물가에 산다)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었고”, 시인은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솔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났다. 그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맑고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라나서 모두 욕심이 없고, 착하고, 정갈해서 가난해도 정답고 좋다는 것이다.
[출처] 선우사(膳友辭) - 함주시초 4, 백석|작성자 잔잔한 울림
https://blog.naver.com/hmc9018/220961639372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채색되지 않은 세상에 물들지 않은 백지와 같이 하얀 사람들이다.
이런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조선의 진정한 선비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다. 백성과 이익을 다투지 않겠다는 것이다. 음식은 친척들이나 이웃들에게 당당하게 얻어먹었고, 주는 이들은 그들을 존중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식들에게 말한다. “우리 집안은 폐족(廢族)이다.”
이는 벼슬길에 나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글공부를 하는 이유는 없는 것일까. 다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짧은 벼슬길에서 그는 거미줄에 걸려 인생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낸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그에게 큰 학문적 성과를 안겨주었을 것이다. 다산은 아들들의 벼슬길은 끊겼지만 진리탐구의 길이 더욱 아름답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예전 선비들에게는 두 가지 학문이 있었다. 하나는 과거를 보아서 입신양명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를 보지 않고 순수하게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지식의 축적과 지혜의 쌓음이 다름과 같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음과 같이.
이를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기 못하느니라”라고 말했다.
순수 학문을 하는 선비는 자부심을 가지고 학문에 몰두했고, 과거에 나아간 선비들도 그들을 존경했다.
퇴계 이황의 대부분의 인생이 벼슬길에 있었다면 남명 조식은 임금이 벼슬을 내려도 가지 않았다.
서경덕은 학문적으로 존경받는 선비였지만 과거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에게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과거를 한 번 본 경험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시험장에서 그의 시험지를 구경하려고 모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다산은 아들들이 가난을 극복하고 학문의 길을 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가 아들들에게 근, 검 두 글자를 유산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근, 검 즉 부지런함과 절제의 덕목은 선비의 길을 가는 데 튼튼한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선비에게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잠자는 시간 말고는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시간이 짧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누가복음(12:16-21)은 말한다.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미래를 예비하여 자신의 재산을 쌓기에만 바쁜 부자에게 오늘 밤 당장 다시 영혼을 하늘이 거두어 간다는 이야기이다. 그러하다면 그렇게 열심히 예비한 재산은 누구 것이 될 것인가를 하나님은 묻고 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늘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다음은 사랑과 결합된 절제의 가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을 사랑하고 베풀려면 절제의 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6:24-34)은 말한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하지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니라.”
위의 말들은 정말 철학적이면서도 멋진 말이다. 이렇게 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카르페 디엠에 인류에 대한 사랑을 덧붙여 놓았다.
인류에 대한 사랑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재물을 귀히 여겨 사욕에 빠지면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다투게 될 것이니, 사랑을 저버리는 것이다. 부(富)가 의(義)를 해친다고 본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생업에 종사하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반대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섬긴다면 재물을 위해 사람들과 다툴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재물은 동시에 추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면서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재물이 없으면(경쟁하지 않으면, 다투지 않으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할 텐데, 하늘이 키울 것이니 사욕을 버리고 내일을 걱정하면서 오늘을 살지 말라고 한다.
여기서 하늘이 키운다는 것은 실질적이고 물질적인 베풂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베풂으로서 얻는, 주는 행복에서 오는 정신적인 기쁨이며, 베풂의 기쁨을 아는 자는 배부를 것이라고 한 것이다. 정말 크고도 큰 말씀이다.
이런 삶은 남과 나를 하나로 볼 수 있는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또 다른 나에게 베푸는 것은 결국 나에게 베푸는 것이기에 나에게는 더하고 덜할 것도 없는 것이다. 제로섬(zero-sum)이다. 결국 얻거나 잃을 것이 없다. 총계는 똑같아진다. 그래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했다. 이 진리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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