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서적 - 시와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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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에서는 언제나 낙엽 냄새가 났다
수많은 가을을 지나 내게 오게 된
소중한 인연처럼 옛 친구처럼 정겨워
굵은 볼펜으로 눌러쓴 누군가의 이름
또는 전화번호
누가 누구에게 주었다는 기록과 날짜
투명 비닐에 정성스럽게 싸여
정자체로 천천히 눌러쓴 이름 세 글자
누군가 잃어버린 소중한 인연 같아서
결코 내 것이 될 것 같지 않았던 두꺼운 수험서
유효기간이 지났을 듯한 네 잎 짜리 행운이
오랜 시간 퇴적된 그 위에
손끝에 온기를 담아 애정을 전해본다
바람이 몇몇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으므로
나의 온기도 바람과 함께 사라져 갈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청주 북문로에는 중고 책방 거리가 있었다. 아마도 다른 도시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당시에는 새 책을 산다는 것은 초등학생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서점에서 한참을 서서 책을 읽거나 아니면 중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소설책이나 만화책을 읽고 다시 팔아서 다른 책을 사서 읽고 하는 식이었다. 헌책방에 들어서면 나는 낙엽 냄새와 같은 고소하고 달달한 향기가 너무나 좋았다. 내가 새 책 보다 중고책을 더 애정하는 것은 유적지의 돌탑을 손으로 쓰다듬을 때의 그 느낌 때문이다. 책에도 따뜻한 역사가 있다. 책장을 넘기다가 퇴적처럼 오래된, 연도를 알 수 없는 색 바랜 화석처럼 고운 나뭇잎을 발견하거나 누구의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전화번호와 책 주인인 듯한 사람의 이름, 빗물에 번진듯한 볼펜 잉크의 쓸쓸함도 내가 중고서적을 애정하는 이유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직 남은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발견할 수 있는 따스함이 좋다. 세월에 닳아도 여전히 그곳에 존재하는 돌탑처럼 누군가의 그 책이 따스한 온기를 지닌 채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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