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에 대한 변명 - 시와 단상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시
아테네에서 그는
한 마리 성가신 등에*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에서 떠밀린 그는
이제 독배를 마시고
새로운 여행을 떠나겠다 한다
호메로스를 만나러 간다고 한다
추한 얼굴에 맨발
지혜를 출산하던 산파
아테네의 등에는
그렇게 떠나갔다
추운 겨울 맨발로 서서
밤을 새워 고민했던 그는
산파이었기에
스스로 아이를 낳아주진 못했다
더딘 산고의 고통과 유산의 죄를
우린 산파에게 지웠다
하늘은 고통 없이는 아이를 주지 않았고
지혜는 고통과 함께 태어났다
*등에 : horse fly. 파리목 등에과 곤충.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교육방법을 문답법이나 산파법이라고 한다.
묻고 답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그 해결책이나 진리를 찾아가듯이,
산모가 아무리 고달파도 산파가 아이를 직접 낳아줄 수 없듯이,
주입식이 아닌 스스로의 능동적인 사색을 통해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이것이 앎의 시작이라 했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면 영원히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만큼은 자신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한다.
삶을 좋은 것 죽음을 나쁜 것이라 말하는데,
아무도 죽음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므로 누구도 죽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그는 죽는 것이 좋은지 사는 것이 좋은지는 신만이 안다고 함으로써 실제 보고 경험한 것만을 앎의 범주에 넣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흔들림 없이 의연하게 우리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는 지혜를.
모든 앎의 시작은 이런 인식에서부터 출발하며, 소크라테스의 가르침도 이것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남의 눈으로 보지 말고 너의 눈으로 보아라.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라. 그것이 너 자신을 아는 길이다.”
다음은 아테네 청년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고소당해 법정에 섰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다.
“아테나이인 여러분 나는 지금 누군가 생각하듯이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여러분이 내게 유죄 투표를 함으로써 신께서 여러분에게 내려주신 선물에 죄를 짓는 일이 없게 하려고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죽이면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표현이 좀 우스꽝스러울지 모르지만, 알기 쉽게 말해 나는 마치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긴 하지만 그 덩치 때문에 굼뜬 편이어서 등에(쇠파리)와 같은 자극이 필요한 말(馬)에게 배정되듯, 신에 의해 이 도시에 배정된 것입니다. 그런 등에 구실을 하라고 신께서 나를 이 도시에 배정하신 것 같단 말입니다. 어디서나 온종일 여러분에게 내려앉아 여러분을 일일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을 여러분은 쉽게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조언을 받아들인다면 나를 살려주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도 졸다가 깬 사람처럼 짜증이 나서 아뉘토스의 조언에 따라 철썩 쳐서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여 나를 대신할 누군가를 보내주시지 않는 한, 여러분은 자면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신께서 이 도시에 내리신 그런 선물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다음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처럼 여러 해 동안 나 자신의 일은 전혀 돌보지 않고 내 집안일이 방치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여러분을 일일이 찾아가 아버지나 형처럼 미덕에 관심을 기울이라고 조언하며 줄곧 여러분의 일을 보아왔는데, 이것이 과연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인가요? 만약 내가 그렇게 해서 이득을 보았거나 조언을 해 주고 보수라도 받았다면, 내 행동은 설명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여러분도 보다시피, 나를 고소한 사람들은 뻔뻔스럽게도 내게 온갖 다른 죄는 덮어씌우면서도 차마 내가 보수를 받았다거나 요구했다는 증거는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내가 내 말이 사실이라는 충분한 증거를 댈 수 있는데,그것은 바로 내가 가난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을 진로를 택하지 않고, 대신 내가 최대의 봉사라고 여기는 것을 여러분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해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자기 자신이 최대한 훌륭하고 지혜로워지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두기 전에 자신의 소유물에 관심을 두지 말도록, 도시 자체에 관심을 두기 전에 도시에 속한 것들에 관심을 두지 말도록, 그 밖의 다른 일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관심을 두도록 여러분을 일일이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런 내가 대체 어떤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지요? 아테나이인 여러분, 진실로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을 제의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떤 혜택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나에게 합당한 혜택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타이르기 위해 여가가 필요한 가난한 은인에게 무엇이 합당할까요? 아테나이인 여러분, 그런 사람에게는 시청사에서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올림피아 경기에 나가 경마나 쌍두마차나 사두마차 경주에서 우승한 사람보다 그런 사람이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마땅합니다.
우승자는 여러분이 행복하다고 여기도록 만들지만 나는 여러분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며, 우승자는 먹을거리가 부족하지 않지만 나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공적에 합당하고 정당한 형량을 제의해야 한다면, 시청사에서 나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해 주기를 제의합니다.”
"아테나이인 여러분! 하지만 나는 동포인 여러분이 내가 대화로 소일하는 것을 참다못해 부담스러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을 모를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은 쉽게 견뎌낼까요? 어림없습니다, 아테나이인 여러분! 내가 이 나이에 이 나라에서 추방되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다가 매번 추방당하면서 여생을 보낸다면 참 멋진 생활이겠군요! 내가 어디로 가든 젊은이들이 여기에서처럼 내 대화를 들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젊은이들을 쫓아 버리면 젊은이들은 부형을 설득하여 나를 내쫓을 것이고, 내가 쫓아버리지 않으면 젊은이들의 아버지와 친족들이 나서서 젊은이들을 위해 나를 내쫓겠지요.
아마 누군가 말하겠지요. “소크라테스여, 당신은 우리 곁을 떠나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은 여러분 가운데 몇몇 분에게는 납득시키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만약 내가 그것은 신에 대한 불복종이며, 그래서 내가 조용히 살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가 핑계를 대는 줄 알고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미덕과 그 밖에 내가 대화를 통해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캐묻곤 하던, 여러분이 들었던 그런 주제들에 관해 날마다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최고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은 인간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내 말을 더더욱 믿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은 내가 주장하는 대로이지만, 여러분을 납득시키기가 쉽지 않군요.”
(배심원들의 표결에 따라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이 확정되고 나서)
“여러분이 조금만 기다렸더라면 여러분이 원하던 일이 저절로 일어났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나는 이미 연로해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가 아니라, 나를 사형에 처하라고 투표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나는 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만약 내가 무죄 방면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아마 내가 여러분을 설득할 만한 말이 부족해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내가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배짱이 두둑하지 못하고 뻔뻔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며, 여러분이 나에게서 가장 듣고 싶었을 말투로 여러분에게 말을 건네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울며불며 앞서 말했듯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한테서 듣는 데 익숙한 온갖 말과 온갖 짓거리를 했더라면, 여러분은 좋아했겠지요. 나는 변론할 때도 내가 위험에 처했다고 해서 자유민답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그렇게 변론한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변론하여 사느니 이렇게 변론하다가 죽는 편이 나에게는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법정에서든 전쟁터에서든, 나도 그렇지만 어느 누구라도 어떻게든 죽지 않으려고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싸움터에서는 스스로 무구를 던져버리고 추격자들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여 죽음을 면하는 경우가 분명 종종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위험에 처하더라도 무슨 짓거리든 하고 무슨 말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죽음을 피할 방도는 그 밖에도 많습니다. 여러분, 죽음을 피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비열함을 피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죽음보다 비열함이 더 발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는 느리고 연로해서 둘 중 더 느린 죽음에 따라 잡혔지만, 내 고소인들은 영리하고 민첩해서 둘 중 더 빠른 것, 즉 사악함에 따라 잡혔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법정을 떠나지만, 내 고소인들은 진리에 의해 사악하고 불의한 자들이라는 판결을 받고 떠날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 죽음이 나름대로 좋은 것이기를 바랄 수 있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은 둘 중 하나입니다. 죽음은 일종의 소멸이어서 죽은 자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말하듯 죽음은 일종의 변화이고 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죽으면 아무 지각도 없어 죽음이 꿈도 꾸지 않는 잠과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놀라운 이득임에 틀림없습니다. 생각건대 만약 어떤 사람이 꿈도 꾸지 않을 만큼 깊은 잠을 잔 밤을 골라, 지금까지 살아온 다른 밤과 낮들과 비교해보고 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런 밤보다 더 훌륭하고 더 즐겁게 보낸 낮과 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충분히 숙고해 본 뒤에 말해야 한다면,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마 페르시아의 대왕이라도 그런 낮과 밤들이 나머지 낮과 밤들보다 쉽게 헤아릴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죽음이 그런 것이라면, 나는 죽음이 이득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럴 경우 영겁(永劫)조차 단 하룻밤보다 더 길어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또한 죽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주와 같은 것이라면 그리고 사람들 말처럼 죽은 사람은 모두 그곳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배심원 여러분,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약 누가 이곳의 자칭 재판관들에게서 벗어나 저승에 가서 그곳에서 재판한다는 미노스, 라다만튀스,아이아코스, 트리프톨레모스 같은 진정한 판관들과 이승에서 올바르게 살았던 다른 반신(半神)을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실망스러운 이주일까요? 또한 여러분 가운데 누가 오르페우스,무사이오스,헤시오도스,호메로스와 함께할 수 있다면 그 대가로 얼마를 내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나는 몇 번이고 죽고 싶습니다. 만약 내가 팔라메데스나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나 그 밖에 부당한 판결로 죽은 옛날의 다른 영웅들을 만나 내 경험을 그들의 경험과 비교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 나에게는 굉장한 일일 테니까요. 그것은 아마 무척 재미있겠지요. 그러나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가운데 누가 진실로 지혜로우며, 누가 지혜롭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는지 가려내기 위해 이곳에서 그랬듯이 그곳 사람들을 캐묻고 떠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겠지요. 배심원 여러분, 누가 트로이아로 대군을 이끌고 간 그 사람이나 오뒷세우스나 시쉬포스나 그 밖에도 이름을 댈 수 있는 수많은 남자와 여자를 캐물을 수 있다면, 그 대가로 얼마인들 내지 못하겠습니까? 그곳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하며 캐묻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일 테니까요. 아무튼 그곳 사람들은 그렇게 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지 않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다른 점에서도 이곳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지만 앞으로 영원히 죽지 않을 테니까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자신감을 갖고 죽음을 맞아야 하며, 착한 사람에게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날 수 없으며, 신들께서는 착한 사람의 일에 무관심하시지 않다는 이 한 가지 진리만은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제는 내가 죽어 노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 좋겠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께서 보내신 신호가 나를 어디에서도 말리지 않았던 것이며, 나도 내게 유죄 투표한 이들과 나를 고소한 사람들에게 전혀 화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내게 유죄 투표하거나 나를 고소한 것은 나를 노고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에서가 아니라 나를 해코지하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 점에서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 아들들이 장성했을 때 미덕보다 돈이나 그 밖의 다른 것에 관심이 더 많다 싶으면, 내가 여러분에게 안겨준 것과 똑같은 고통을 그 아이들에게 안겨줌으로써 복수하십시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젠체하면, 내가 여러분을 나무랐듯이, 그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며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면서 자신들이 쓸모 있다고 생각한다고 나무라주십시오. 여러분이 그렇게 해 주신다면, 나도 내 아들들도 여러분에게 정당한 대접을 받는 셈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운명을 향해 가는지는, 신 말고는 아무도 모릅니다.”
플라톤 저, 천병희 역,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향연》, 숲, 2012.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