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 시와 단상

 





거리에서 만난 옛 추억과 시소를 탔지

이제 그리움보다 쓸쓸함의 무게로 기울어

돌이 되어버린 기억    

 

스위트 와인을 마시던 시대가 있었지

봄바람이 작은 창을 넘어 옷깃에 꽃향기를 묻히던 

어느 이른 저녁의 봄

유화보다는 수채화를 좋아했던

청춘의 봄      


눈부신 투명한 태양이 나신裸身으로 온몸에 부서지던

꿀벌의 윙윙 소리만 들리던 나른한 공원의 벤치

사랑을 놓치거나 사랑을 버리거나

그다지 마음 아프지 않았던 

화이트 와인처럼 가볍고 순한 그런 사랑도 있었지

     

사랑은 카페라떼처럼 순해야 한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지

라떼는 밍밍하고 개성 없다며 

조금은 씁쓸하지만 깔끔한 아메리카노에서

순수함 맛 시간을 빼버리고 

바쁜 세상 한 번에 홀짝

다 마셔버린 후 찾아오는 씁쓸 달콤한 뒷맛으로

그 이름도 어여쁜 에스프레소를 마셨지





오래전 대학생 때 나 홀로 유럽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영국에서 파운드화를 환전하고 보니 터무니없는 물가에  망연자실하여  

런던 작은 노천카페에 앉아 메뉴판을 보았다.  

몸은 피곤하고 배는 고픈데  바게뜨 한 조각과 가장 싸고 예쁜 이름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커피가 대중화되지 않은 시기.  

에스프레소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  

정말 작은 잔에  커피 양은 적어서 바닥이 보일 정도였고 그마저도 너무 써서 남기고 나온 기억이 있다.  

지금은  아메리카노에 에스프레소 두 잔을 넣어서 마실 때도 있다.




95년 여름 나의 유럽 배낭 여행기.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강은 흐르고


     

흔히 여행은 그리운 여인을 대할 때처럼 설레임으로 시작된다. 어릴 때부터 서양 동화와 소설을 좋아한 나에게 있어서 유럽은 그리운 제2의 고향이 되어 있었다. 특히 넉넉하고 부드럽고 센티멘탈한 프랑스 문화에 접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어지러운 유럽문화의 홍수 속에서 와전되어 어설피 전해지는 외래문화를 근본적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여행 준비는 너무도 힘들었다. 여권(총장 추천서와 보증인 2명이 있어야 여행 허가서가 나왔다.) , 국제 학생증, 유스호스텔 회원증, 환전, 침낭, 항공 티켓, 유레일패스, 보험증 등을 준비하고 기초회화와 현지 정보를 위해 여행사와 도서관, 서점을 드나들어야했고, 여행 비용을 위한 힘든 아르바이트 기간이 있었다. 여행 준비를 다하고 출국일을 하루 앞둔 날엔 여행이 끝난 기분처럼 피곤했던 것이 사실이다. 방학 두 달간을 오로지 여행을 위해서 보냈다. 7월 달은 아르바이트만 하고 8월 4일에 출국해서 개강을 며칠 앞둔 8월 29일에 귀국했다. 특히나 그 짜증나는 준비 기간도 무척이나 짧을 수 밖에 없었다. 여행사에서 값싼 단체항공 티켓을 샀기 때문에 공항에서 여행사 직원을 기다리는데 몇몇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과 기내에서 정보교환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가장 큰 문제 거리가 숙소와 의사소통 문제였고, 서로가 가져온 숙박정보와 그 나라 관광정보를 이야기했다. 내가 이용한 항공이 홍콩항공(케세이 퍼시픽) 이었기 때문에 홍콩을 경유하게 되어있었다. 이슬비에 젖은 창으로 바라본 홍콩의 야경은 아름다웠고 신선했다. 홍콩에서 한시간 머무른 후 비행기를 갈아타고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향했다. 홍콩까지 4시간, 런던까지 약 14시간 가량이었다. 너무 지루했다. 헤드폰 속에서 잠결에 오락가락하는 일본 여가수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이쁘다고 생각하면서 깊이 잠들만 하면 깨워서 음료수와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런던 히드로 공항의 입국 수속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E.C 회원국 이용 통로와 그 외 외국인 통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E.C 회원들은 어려움 없이 입국 수속이 끝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저런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입국 이유와 여행 경비와 체류일자, 머무를 숙소이름까지 물어왔다. 나의 영어 수준을 감지했는지 수속원은 또박또박 물어 주었고 나도 또박또박 대답해 주었다. 입국 수속은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었다.

런던의 아침 날씨는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쌀쌀했다.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지도를 들고 하이드파크를 물어물어 찾았다. 아침이라 그런지 공원이 너무 넓어서 그런지 약간 허전해 보였지만 햇볕만은 따뜻했다. 풍채 좋은 영국 신사가 지나가면서 활짝 미소했고 나는 Hello로 답해주었다. 여기 사람들은 무척 친절했고 여유로왔다. 우선 집에 전화하고 숙소를 구하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유스호스텔은 한달 전에 예약이 끝난 상태고 숙박료 또한 황당할 정도로 비쌌다. 결국 찾아간 곳이 런던에서 가장 싸다는 Tent city 였는데, 그 곳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쳤고 그날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가 있었다. Welcome to tent city 로 꾸며진 무대엔 사회자 한명이 섰고 옆 칠판엔 여행자들의 국적이 빽빽이 적혀 있었는데 어림잡아도 20여개국은 될 것 같았다. 각국의 젊은이들이 각자 나라별로 한 테이블씩을 점령했고 한국인들도 맨 앞 테이블에 자리하고 앉았다. 나라별 장기자랑이 시작되었는데 모두 단체합창으로 일관했다. 의외로 유럽 젊은이들도 부끄러워 할 줄 알았다. 특히 동유럽 중에서 폴란드 여자애 한명이 거의 얼굴을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워 하는 걸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김수철의 ‘젊은 그대’로 그들을 흥분시켰고 그들은 ‘Japan Japan’ 이라는 구호로 우리를 흥분시켰다. 그들은 동양엔 일본과 중국 두 나라만이 존재하는 줄 알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을 모른다는 사실이 슬펐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전통의상과 악기연주였고, 결국 그들이 멕시코 특유의 정열적인 ‘라밤바’ 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앵콜 공연이 있었고 라밤바와 스코틀랜드 민요는 이국적 정취에 취하게 하는데 충분했다. 

다음 날 템즈 강변에 있는 국회의사당과 웨스터민스터사원, 그리고 버킹엄궁을 찾았다. 특히 놀라운 것은 공원 곳곳에 귀한 조각품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국회의사당 옆 조그마한 정원에서 로댕의 ‘꺌레의 시민들’ 을 보고 놀랐다. 웨스터민스터사원 로비에는 커피향이 구수했고 사람들은 제각기 기대고 앉아 저마다의 가치관과 추억과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사원의 분위기에, 커피 냄새에 취해있었다. 내가 자리 잡은 그 오래된 대리석이 따뜻하게 느껴졌고 한 잔의 커피에 온 몸이 노곤히 풀려 일어서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던 것같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피곤한 몸으로 동네 슈퍼에서 빵과 잼, 사과, 우유, 버드와이저 등을 사들고 Tent city 앞 잔디 밭에 앉아 동네 꼬마의 축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녁을 먹었다. 그애 이름은 스티브라고 했다. 그는 여행자들이 주고 간 동전들을 보여주며 어느 나라 돈이냐고 물어왔고 나는 아마도 이라크나 이란 돈 같다고 했고, 우리 돈 100원을 꺼내 주었다. 그 애와 사진 한 장 찍고 같이 축구도 했다. 얼마 후 그애 엄마인 듯한 온화한 얼굴의 부인이 저녁 먹으라고 손짓했고 그 아이와 나는 짧은 시간의 만남을 아쉬워했다. 그 아이의 말이 근처의 교도소에서 한 명의 죄수가 탈옥을 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갑자기 여러 가지 무서운 이야기에 시달렸던 어린 시절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다. 

런던 대영박물관과 타워브리지, 런던탑 등 잘 알려진 명소에 싫증을 느낀 나는 그 나라 사람들의 실생활을 엿보고 싶었다. 노을이 내릴 때쯤 2층 버스에 올라 번화가인 피카딜리 극장 부근으로 향했다. 빅토리아 역만큼이나 사람들로 붐볐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점이라는 간판이 붙은 서점에 들러 셰익스피어와 푸쉬킨의 시집 각각을 1파운드에 샀다. 규모로 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서점이란 간판이 거짓은 아닌 것같다. 파란 눈과 금발의 물결 속에서 시끌벅적한 bar와 많은 상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한 오락실에 들어갔는데 스케일이 웅장했다. 벽에 스크린이 있고 그앞 벤츠차로 오락을 즐겼다.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번화가를 중심으로 뒤쪽 골목에는 환락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Sex shop 이 줄지어 있었고 어느 여인의 따뜻한 손을 정중하게 뿌리치는 데 꽤나 긴 실랑이가 있었다.(Why not? I have no money......) 

거리에서는 각종 악사들의 연주가 발걸음을 더디게 했고, 고급 리무진의 창에 비친 소녀의 얼굴이 이쁘다고도 생각했다. 11시 30분쯤 지하철이 끊겼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지하도로 뛰기 시작했다. 예감이 맞았다. 사람들은 뛰고 있었고 나는 더 빨리 뛰었다. 내가 가려는 지하철 구간이 폐쇄되었고, 순간 눈엔 핏줄이 섰다. 약간 떨리는 다급한 목소리로 역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시가 급한데 그는 느긋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역으로 가서 갈아타면 된다고 했다. 순간 긴장이 확 풀리면서 발걸음을 옮겼고, 무사히 숙소까지 돌아오긴 했지만 돌아와 생각하니 아슬아슬한 모험이었다. 

런던 물가가 너무 비싸고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빨리 대륙으로 건너가야겠다는 생각에 다음날 아침 프랑스까지 가는 배편을 예약한 후 옥스퍼드로 향했다. 그곳 사람들의 삶은 여유로왔고 지나면서 미소와 Hello를 잊지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가 되었을 듯한 고풍적인 거리와 건물들, 여유로운 그곳 사람들의 발걸음과 얼굴 표정에 집에 온 듯 편안했다. 

도버해협을 건너 프랑스로 가는 배안에서 말로만 듣던 French kiss 를 목격했다. 그들의 눈은 설탕을 녹이고 있었고 내 눈에서는 뻐꾸기가 울었다. 저녁 때쯤 출발해서 다음날 아침 파리에 도착했다. 시간을 한 시간 돌려 7시로 맞춘 후 몸을 녹이기 위해 가까운 까페에 들어갔다. 까페오레 한 잔에 두시간을 버텼다. 까페주인은 약도까지 그려가면서 유스호스텔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고 출근 길에 잠깐 들린 듯한 동네 아저씨도 거들었다. 하지만 불어는 도저히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 그냥 인사말만 되풀이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파리 지하철은 Metro 라고 하는데, 노선이 복잡하고 RER 이라는 교외노선까지 연결돼서 헤매기 시작했다. 헤매는 와중에도 나를 달래준 건 악사들이었다. 길고 긴 에스컬레이터와 지하철내에서 흐르는 감미로운 음악은 여행객의 외로움과 긴장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많이 연주하는 곡이 프란시스 레이의 영화<대부> 주제곡인데 그냥 듣기에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나는 그곳 사람들의 예술관이 마음에 든다. 그들은 아무리 초라한 거리의 악사라 할지라도 그들의 감정을 울리는 악사들에게는 인색함이 없이 지폐도 아무렇지 않은 듯 꺼내준다. 예술가만이 예술을 한다고 생각지 않고 그들에게 있어 예술은 정말 대중적이었다. 여행가들의 배낭 속에는 간단한 스케치북과 연필이 들었고 아무리 기타를 못 치는 사람도 기타소리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센느 강변의 초상화가들, 거리의 악사들이 예술의 도시 파리를 만들어간다. 과거의 많은 추억거리를 묵묵히 안고 흐르는 센느강의 보호아래 우뚝 솟은 시테섬 노틀담의 종루엔 아직 곱추가 살고 있기를...... 

이곳 사람들의 인생관은 ‘Why not?’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을 것같다.

한 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인상파 미술작품 대부분이 그 미술관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갔는데, 그림책에서만 보았던 고흐, 고갱, 르느와르, 마네, 모네, 세잔 등의 그림들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는 한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조각상이었다. 유럽에서 먼 어느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단지 고흐의 그림을 보려고 힘들게 찾아온 가련한 예술가인 듯하다. 

‘ 당신의 아무렇게나 걸친 허름한 옷에, 감격한 눈빛에 강한 정열과 삶을 느끼며 정중히 경의를 표합니다. 내가 지금 당신 앞에 선 빈센트 반 고흐라면 이 자리에 거꾸러져 죽어도 행복하겠나이다.’

이 미술관은 플래시 사용금지였지만 몰래몰래 몇 장의 사진으로 흥분을 달랬다.

집에 처음 우편엽서를 띄운 것은 에펠탑에서 였다. 계단으로 에펠탑 2층으로 오르면 우체국과 간이 음식점, 기념품점이 있다. 5프랑짜리 예쁜 엽서 두 장에 그동안의 일들을 빽빽이 적어내려갔다. 쌀밥, 김치, 라면, 돼지고기가 가장 먹고 싶다고 쓴 기억이 난다. 에펠탑 앞 센느강변에서 바라본 느긋한 유람선들은 여유가 있고 낭만이 있었다. 50프랑에 유람선에 올라 가이드의 안내 방송을 들으며 센느강의 여름 햇살과 여유와 강변의 건물들과 산책하는 사람들을 즐겼다. 가이드의 목소리는 자부심에 한껏 고조되어 엄숙하게까지 느껴졌다. 불어, 영어, 독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유창하게 이야기하는데 놀랐다. 

한 시간의 센느강 여정을 마치고 7시쯤 개선문과 샹젤리제를 찾았다. 샹젤리제의 노천까페들과 여러 인종들, 저마다 이 거리에서 무엇인가 기대하는 듯한 얼굴들. 남아프리카에서 온 듯한 온 몸을 금으로 치장한 흑인가족, 모로코 공주쯤 되어보이는 지적이고 귀족 스타일의 여인, 다소곳이 베일로 얼굴을 가린 인도여성과 서양인 남편. 가지각색의 인종들이 모여서 색다른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샹젤리제의 밤은 깊었고 유스호스텔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지하철은 쓸쓸했고 지하철에서 벗어난 거리는 무서울 정도로 적막했다. 내 뒤에 오는 흑인들에게 경계심을 느끼면서 부지런히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는다. 유스호스텔도 그 시간엔 초인종 누르기가 무섭게 조용했고 피곤한 몸으로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샤워실로 가서 간단히 샤워하고 사과 한 개를 꺼내 바삭거리며 맛있게 먹고 창문을 닫은 뒤 침대로 파고들었다. 

다음 날 프랑스 현대예술을 대표하는 퐁피두센터를 들러 몽마르뜨르 언덕에 위치한 사원에 갔는데, 마침 저녁 미사를 드리고 있었고 황홀한 석양과 스테인드 글라스는 찬란했으며 수많은 촛불들은 성스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방명록에 싸인한 후 성가대의 근엄한 합창과 파이프오르간의 장중한 선율에 묘한 기분에 들떠 성모마리아상 앞 빛바랜 의자에 앉아 마음을 비웠다. 루브르 박물관에선 한국인 여선생님을 만났는데, 오늘밤 기차로 로마까지 간다고 했고 거기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8시에 리용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베르사이유궁으로 향했다. 루브르박물관은 대영박물관과는 달리 미술품과 조각품이 많았는데 모나리자와 밀로섬의 비너스가 대표적이었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모나리자는 유리로 둘려 있었고, 앞에는 많이 붐볐다. 생각보다 그림의 크기가 작은데에 놀랐다. 베르사이유궁의 정원만 둘러보는데도 한참이 걸렸고, 결국 리용역에서의 약속 시간을 어기고 말았다. 약속한 사람과 만나지 못한 채 목적지를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니스로 바꾸고 유레일패스에 처음으로 날짜와 스템프를 찍었다. 차창의 아침 햇살에 어렴풋이 보이는 프랑스 남부의 집들과 해변은 무척 이국적이었고 신선했다. 칸느를 지나 40분쯤 달려 니스에 도착했다. 20 프랑에 캐빈을 빌려 반나절 수영과 따뜻한 햇볕을 즐기며 그동안 쌓인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오후 4시쯤 모나코의 몬테카를로로 향했다. 그곳은 한마디로 사치와 낭만의 도시였다. 유명한 카지노와 자동차경주가 있는 곳, 롤스로이스를 비롯한 호화 자동차들이 늘어선 곳, 카지노 앞 바닷가 풍경이 매력적인 곳이다. 몬테카를로의 고성은 너무 낭만적인데, 둘이 걷기에 알맞은 폭으로 바닷가를 접한 절벽의 꼬불꼬불한 돌길은 혼자 걷기엔 너무도 외롭고 미련이 남는 길인 것 같다. 바다를 향해 선 한 병사와 그에 매달리듯 안긴 한 여인의 흐느끼는 조각상은 이 성의 역사와 낭만과 사랑을 가장 잘 느낄 수 있게 한다.

카지노 반대편에 떨어진 오밀조밀한 주택가는 너무도 향토적이고 모든 집들이 내집같이 편안하다. 주택가 길을 걷다보면 퇴근을 마친 시간인 듯 동네 상점에서 빵과 과일 등을 양손에 들고 총총히 집으로 향하는 부인을 볼 수 있다. 내 눈높이쯤 살짝 열린 유리창을 지날 땐 저녁 뉴스인듯 아나운서의 편안하고 둔탁한 목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 구수한 냄새, 웃음섞인 대화, 어느 소녀의 한바탕 웃음소리에 강한 향수와 외로움에 젖는다. 이럴 때는 그냥 주저앉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왜 집을 떠나 머나면 이국 땅에서 향수를 느끼며 외로워하는가?’ 이해 할 수 없다는 듯 지나는 사람들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몬테카를로의 야경에 아쉬움을 남기고 스위스 제네바로 향했다. 레만호의 거센 바람에 머리와 옷자락을 날리고 있으면 해적선의 선장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레만호 근처 공원의 꽃시계 앞엔 사진 찍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태리 베네치아(베니스)에 도착하자마자 배에 올라 산마르코 광장으로 갔다. 야채, 과일시장과 어시장을 돌면서 코코넛, 열대수박, 타원형 청포도, 참치샌드위치 등 이것 저것 먹었다. 우선 다른 곳에 비해 값싸고 맛있었다. 베네치아에서는 먹는 것에만 열중하기로 했다. 너무 피곤했고, 유럽 물가가 너무 비싸 제대로 먹고 다니지 못한 탓도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을 이곳에서 절실히 느낀다. 일본인들은 유럽 어디를 가도 국내 물가보다 싸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떤 레스토랑도 주저없이 들어가고 그 비싼 곤돌라를 타고 이곳저곳을 누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일본인들은 상인들에게 인기가 좋다. 중세 부유했던 지중해 상업도시답게 작은 골목골목 사람들로 빽빽했고, 진열장에는 정교한 유리세공품과 가면 무도회 때 쓰는 가면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고, 건물은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듯 암갈색의 고퐁적인 향기를 지니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와 ‘베니스의 상인’을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셰익스피어가 본 베니스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웠을까? 노을이 비둘기의 그림자를 길게 늘일 때쯤 숙소를 구하지 못한 나는 밤기차에서 자기로 마음먹고 다음날 아침에 도착하는 도시를 찾았다.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으로 가는 밤기차는 만원이었다. 프랑스인 학생 둘을 같은 컴파트먼트에서 만났는데 그 중 한 명이 베네치아에서 산 듯한 술 한 병을 꺼내서 한모금 들이키고 나에게 권했다. 입안 가득히 채운 후 급하게 넘어간 알콜이 온 몸에 퍼졌고 피곤한 몸을 나른하게 녹이면서 그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비엔나에서 먹으려고 샀던 달콤한 포도를 덜컹거리는 기차에서 비틀거리면 배낭에서 꺼내 그들에게 맛보였고, 맛있는 술안주가 되었다. 차장이 왔을 때 우리는 한껏 들떠 있었고 차장 또한 분위기에 동화되어 한마디 거들어주었다. 그들은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에서부터 이태리를 거쳐 다시 올라간다고 했다. 비엔나로 가는 기차는 무척 추웠다. 결국 침낭 속에서 몇 시간 잔 후에 아침 7시쯤엔 Wien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우선 유스호스텔부터 찾아 샤워부터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3시부터 입실 할 수 있다는 말에 짜증났지만 배낭은 맡기고 작은 가방만을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며칠동안 샤워도 못하고 배도 고프고 특히 밥이 너무나 먹고 싶었다. 모든 걸 제쳐두고 책자에 소개된 한국음식점을 찾았다. 두 시간이나 넘게 찾아 다니다가 그 근처에 산다는 어떤 쾌활한 아저씨와 같이 걸었다.

‘까치네’란 한국간판이 그렇게 반가운 적은 없었다. 문을 열자 놀랍게도 그 동안 듣지 못했던 한국말로 시끌벅적했다. 그런데 별로 반갑지도 않았다. 이곳 저곳에서 본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많은 실망을 느껴서일 것이다. 음식값이 너무 비쌌다. 신라면이 70실링, 육계장이 100실링이었다. 신라면과 공기밥 하나를 시켜 게걸스럽게 먹었다. 옆 테이블에선 식사가 끝난 모양으로 밥 한톨, 김치 한 조각 남김없이 혀로 핥은 듯 깨끗했다. 그들은 주인에게 인스부르크와 짤스부르크로 가는 기차 시간과 방법을 물었다. 나도 내일은 짤스부르크로 계획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짤스부르크까지 가는 기차는 아침에 있고 빈에서 두시간 거리라고 했다. 문 옆 테이블에서는 홀로 온 듯한 한국인 여학생 한명과 기차에서 만난 것 같은 예비역쯤 되어 보이는 남자 한명이 마주하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예쁜 얼굴로 어떻게 혼자 여행하느냐는 둥 그 여학생을 꼬셔보겠다고 갖은 아양을 떨며 비위를 맞추는 꼴이란 제3자의 입장에서 보지 않으면 그가 얼마나 역겨운지 모를 것이다. 그 여학생의 나약한 말투가 어째 위태위태하다.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은 혼자 유럽여행을 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외로워야 하는지를. 여행을 위해 유럽에 간다면 절대 혼자는 떠나지 말라. 그 남자의 제안에 대한 여학생의 나약한 태도가 안타까웠지만 얼른 일어나 지불하고 나와버렸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 이후 여정을 간단히 소개하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단편적인 생각들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오스트리아 빈-짤스부르크-헝가리 부다페스트-체코 프라하-독일 뮌헨-퓌센-로마-나폴리-폼페이-하이델베르그-프랑크푸르트-홍콩-서울-청주(8월 29일)     

나폴리에서 산타루치아역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 다비드상을 닮은 하얀 대리석의 피부와 윤기를 가진 미소년, 부다페스트로 가는 밤기차에서의 격렬한 부부싸움, 천년동안 한차례의 비도 없이 자외선의 투명한 빛만으로 구워진 토기처럼 오랜 흑백사진 보다 더 바랜 듯한 화산도시 폼페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식당 벽화로 간직하고 있는 산타마리아 교회가 있는 패션과 상업의 도시 밀라노,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수 있는 로마 등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쓰지 못한 점이 아쉽다.

독일인 한 가족과, 같은 컴파트먼트에서 마주 앉은 채 뮌헨행 기차는 창 밖으로 독일 특유의 깔끔하고 신선한 풍경을 지나치고 있었다. 아들인 듯한 아이가 가방에서 오래 묵은 듯한 커다란 카세트 라디오를 귀에 꽂고 신나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수시로 무엇인가 끊임없이 먹고 있었다. 그 옆의 보기좋게 턱수염을 기른 그 아이 아버지는 나와 마주 앉아 눈 마주치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가방에서 스케치북과 필기도구를 꺼내더니 창 밖의 풍경을 그리면서 스스로도 만족한 듯 가끔 싱긋 웃으면서 고개짓을 하곤 했다. 덕분에 나도 그 아저씨와 눈 마주치지 않고 편한 마음으로 창밖을 구경하거나 그들의 행동을 자세히 살필 수 있어 좋았다. 내 옆에 앉은 어머니인 듯한 여인이 부스럭거리며 무엇인가를 꺼내놓고 있었다. 약간의 과자와 과일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레 웃으면서 내가 걸리는지 과자좀 먹어보라 권했고 왜 그랬는지 나는 사양하고 말았다. 뮌헨으로 가는 중간역에서 몇 분 정차하는 듯하더니 여행객인 듯한 한 여자가 몸에 걸맞지 않게 커다란 배낭을 메고 우리 컴파트먼트를 살피더니 내 앞에 자리 있느냐고 물었고 앉으라고 대답했다. 그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내 앞에서 계속 생글생글 웃었고 웬지 부담스러웠다. 같이 웃어줘야 할 것 같았지만 그때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얼마 후에 그 커다란 배낭에서 무엇인가를 찾다가 그 안에서 점심인 듯한 햄을 끼운 빵과 음료수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나도 배가 고팠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먹으라고 권하면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 혼자만 즐기고 있었다.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독일인 가족은 어느 이름없는 역에서 내렸고 나와 그 여자만이 마주한 채 흘끗흘끗 서로를 관찰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 책표지에는 ‘위대한 개츠비’ 라고 씌여있었다. 언젠가 비디오 가게에서 뽑아서 볼까말까 망설이다 다시 끼워둔 그 영화의 원작이었다. 영어로 씌어진 책인 걸 보니 독일인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우리는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한채 나는 피곤해서 누워 자기 시작했다. 얼마 후 역원의 옷차림을 한 여자가 와서 깨우기 시작한다. 종착역인 뮌헨이란다. 나 혼자만이 자고 있었던 것이다. 창 밖은 어두웠고 나는 배낭과 모자를 찾아 빠진 게 없는지 살피다가 아까 내 앞에 앉아 가던 여자가 남긴 듯한 빵봉지를 발견하곤 아무 생각없이 들고 나왔다. 뮌헨역은 크고 깨끗했다. 캔맥주를 하나 사들고 대합실로 가서 빵과 함께 먹기 시작했다. 딱딱 했지만 집에서 만든 빵인지 맛이 있었다. 특히 짭짤하면서도 알찬 듯한 햄 맛이 일품이었다. 이 곳에는 여기서 하룻밤 지낼 듯 여기저기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로마역에서 하룻밤 자기로 하고 아침 일찍 나폴리행 기차를 타려고 자명종을 맞춰놓은 뒤 나폴리에 대한 정보를 익히면서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밤 열 시쯤이었던 것 같다. 한국인 여자 세 명이 오더니 한국인이냐고 물었고 그들은 내일 베네치아로 가는데 방을 못구해서 여기서 노숙 할 수 밖에 없으니 같이 있어달라고 했고 나도 좋았다. 두 명은 부산에서 왔다고 했는데 한 명은 빨간 미니 스커트를 입었고 그 친구인 듯한 한명은 그녀의 보디가드인 듯 청잠바와 청바지 차림으로 터프해 보였다. 또 한 사람은 혼자 여행하다가 그들과 만났노라고 했다. 그 두 명은 내일 로마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집에 간다고 좋아했고 다른 한명에게 그리던 김치와 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며 좋아했다. 그들 두 명이 두 달째 여행을 했다는 말에 놀랐고 옷이 그렇게 깨끗한 데 대해 놀랐다. 그들은 비행기에서 슬쩍 했다는 모포로 몸을 감싼 채 새우 잠을 자기 시작했고 한 명만이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이었다. 나는 배낭이 무거워서 넣었던 라면을 빼면서 소설책은 아예 가져올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이국에서 본 한국 여인중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기억에 남았다. 얼마후 모두가 잠들었는데도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더구나 아까부터 우리쪽을 보며 기분 나쁘게 웃는 두 명의 이국인이 마음에 걸렸다. 배낭을 안고 자고 깨고 하다가 자명종이 울렸고 나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 후 홀로 6시 15분 발 나폴리행 기차를 찾아 나섰다.      

체코에서 독일 도르트문트행 기차를 탔는데 프라하에 산다는 두 명의 고등학생들과 마주보며 가게 되었고 그 중 한명이 말을 걸어왔다.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하지 서울을 안다고 했고 한국돈이 비싸다고도 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그들은 일본 자동차에 대해 이야기 했다. 토요타를 타 보았냐는 것이다. 아주 좋은 차라고 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일제 아이와 미니 카세트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자랑스러운 듯 보였고 나는 짐짓 부러운 체하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들은 미국 필름에서 한국전을 보았고 그것으로 처음 한국을 알게 되었다고 하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학생이라고 하자 학비가 비싸지 않느냐고 했다. 매우 비싸다고 하자 아르바이트로 그 만큼의 학비를 벌 수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아버지가 학비를 부담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체코돈 1크로닌이 한국돈으로 얼마냐고 물은 뒤 우리학교 수업료를 계산하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체코는 체코어를 쓰는데 얼마전 까지만 해도 소련어를 제2 외국어로 배웠고 그 때는 가장 인정받는 외국어였으며 그 외 언어는 배울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영어나 독일어도 배운다고 했다. 그 중 한명은 영어를 했고 한 명은 독일어를 했는데 나는 영어로 그 중 한명과 이야기 했고 다른 한 명은 그 친구로부터 체코어로 내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우리말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그는 영어로 ‘father’를 쓴 뒤 그 뜻을 우리말로 옆에 적어달라고 했고 나는 옆에 ‘아빠’라고 썼다. 그러자 “ f ”와 “ㅇ”가 같은 뜻을 의미하냐고 묻는 바람에 나는 당황했고 그가 원하는 것이 대충 무엇인가 알 것같았다. 우리말 자음과 모음, 영어의 자음과 모음군을 쓰고 각각의 같은 그룹이 같은 기능을 한다고 설명하자 조금은 알겠다는 듯 끄덕였다. 그는 우리말이 표음문자인지 표의문자인지를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얼마간 그들은 그들 말로 이야기하면서 때때로 웃기도 하고 침묵하다가 또 이야기 하곤 했다.

나는 그들에게 프라하는 굉장히 멋있고 인상깊었다고 이야기 하면서 보헤미아는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체코 근처에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웃으면서 보헤미아는 체코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했다. 한국 학생들도 보헤미아 민요를 배운다고 하자 매우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중고등학교 때 나는 보헤미아의 애절하고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들을 좋아했는데 그들에게는 매우 센티멘탈한 노래라고 이야기했더니 그들은 아니라고 했다. 경쾌하고 신나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영어라도 좋으니 노랫말이라도 적어 줄 수 있느냐고 했지만 나는 능력상 안되고 아주 오래전 일이라 생각 안난다고 했다. 그들은 체코 국가(國歌)도 배웠냐고 물었다. 한국에서는 여러 나라의 민요는 배우지만 국가는 배우지 않는다고 했다.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차장이 여권과 티켓을 요구했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뮌헨으로 간다고 했더니 오른손을 가슴쪽에 고정시킨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여기서부터 여덟 번 째 컴파트먼트로 옮기라고 했다. 이 객차는 중간에 분리되어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결국 아쉬워하면서 배낭을 메고 일어섰고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한 번 더 돌아본 뒤 손을 흔들며 복도로 나와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스호스텔 카운터에서 체크아웃 하면서 열쇠 반납하고 유스호스텔 회원증을 돌려 받은 뒤 옆에 있던 한 흑인에게 역으로 가는 방법을 물었다. 그는 ‘Follow me’, 따라 오라고 했다. 그도 그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조금 걷다가 그는 버스타고 갈거냐 아니면 걸어 갈거냐고 물었다. 걸으면 30분쯤 걸리고 버스는 여기서 기다리면 5분 후면 온다고 했다. 우리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이야기했다. 내가 한국인이란 것을 유스호스텔 카드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한국을 아느냐 물었더니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흑인이기에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처음엔 막연히 ‘아프리카’ 라고만 했다. 구체적으로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아마도 다른 나라 사람은 아프리카 내에 있는 나라들은 알지도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듯 했다. 결국 ‘가나’ 라는 말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나 초콜릿을 먹는다고 하자 그는 더 놀라는 표정을 짓고는 믿기지 않는지 다시 한번 물어왔다. 가나에 온 일이 있느냐고 물었고 나도 같은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나에서 영어를 쓰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그 곳에서 유능한 인물로 대우 받다가 좀 더 큰 포부를 가지고 이 곳까지 왔으리라. 정든 고향을 버리고 피끓는 정열과 큰 포부를 가지고 도시로 올라온 젊은이라면 적당한 표현이 될까? 유스호스텔의 한 직원으로서 만족할지는 의문이지만 ‘적과흑’의 줄리앵과 같은 비극적 운명은 없기를 바란다. 

어느새 트램이 앞에 섰고 우리는 올라탔다. 역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역에 도착하자 그는 짤스부르크행 기차까지 나를 안내한 후 아까 그 트램을 또 타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유스호스텔로 되돌아 가려는 것이다. 결국은 나 때문에 역까지 온 듯 하다. 어찌나 미안하고 고마웠던지. 나는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학교 배지를 발견하고는 그거라도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내밀자 손을 흔들며 안 받겠다는 것이다. 돈인줄 알았나보다. 내가 다니는 학교 배지니 그냥 받아 달라고 했더니 고맙게 받았다. 그 좋아하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악수로 굳게 손 맞잡고 ‘굿바이’라는 말 한마디로 헤어지고 말았다.     

프라하의 카를교(橋)만큼이나 낭만적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도 없다. 200크로닌을 주고 본 저녁 음악회의 감동을 간직한 채 카를교 위에서 불 빛에 녹아 흐르는 강물에 눈을 고정시킨 채 양 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때때로 커다란 유람선이 다리 밑으로 지나가면서 흘리는 둔탁한 불빛들은 마음을 한없이 편안하게 한다. 작은 나뭇배 하나가 가운데 촛불 하나에 떨며 연인을 태우고 고요한 연못에 잉어 튀듯 노젓는 소리에 미끄러지듯 흐를 땐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낀다. 다음날 30크로닌을 주고 잘 길들여진 조각배 하나에 몸을 싣고 바로 옆엔 맥주병을 위태롭게 세워두고 노를 저어 카를교 밑으로 향했다. 카를교 밑에서 제멋대로 가도록 노를 올려놓은 채 시원한 맥주와 소시지는 맛있었고 여행중 가장 여유로운 시간을 이 조그만 나뭇배에서 보낼 줄은 몰랐다. 한시간 반이나 이리 저리 배를 끌고 다닌 후 근처 노천 레스토랑에서 생선 요리를 먹었다. 체코는 물가가 싸서 흔히 여행객들의 영양보충장소로서 인기가 높다. 강 바로 옆 식탁에 앉았는데 돌난간에 아무렇게나 앉아 낚시하는 아이가 흥미롭게도 잡은 고기를 그냥 강에 던져주는 것이었다. 그 옆에서 나는 아주 맛있게 생선 요리를 먹었다.     

파리에서의 일이다. 파리에 막 도착한 후 유스호스텔 본부를 찾았다. 안내원이 친절하게도 유스호스텔 각각의 위치와 숙박료를 설명했고 나는 가장 저렴하고 경치 좋다고 씌어진 곳을 택했고 예약 전화를 요구하자 예약없이 가도 지금은 방이 있을 것이란 말에 지하철을 타고 다시 RER 로 바꿔타서 파리 근교 CHOISY LE ROI역에서 내린 후 마음씨 좋게 생긴 한 중년 부인에게 길을 물었다. 거리 이름을 대고 유스호스텔을 묻자 따라오라고 했다. 한 오분쯤 계속 같이 걸었다. 그 부인은 나와 반대쪽에서 지하철을 타려 했는데 반대 방향으로 계속 가는 것이었다. 나는 중간중간 미안하다고 했고 그 부인은 괜찮다고 했다. 가다보니 큰 길이 나왔다. 큰 길을 따라가다가 다리가 끝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다 보면 틀림없이 유스호스텔이 있다고 하면서 잘 가라는 말과 함께 따뜻한 미소까지 지어주었다. 나는 외국인들을 만나면 주려고 사진 몇 장과 설악산 풍경이 담긴 그림 엽서들을 가져왔는데 그것들을 다 꺼내 주고 말았다. 가방을 열자 그 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그냥 가려고 했는데 간단한 그림 엽서니 받아 달라고 하자 아주 좋아했다. Merci란 말만 세 번 들었다. 이곳 유스호스텔 숙박료는 아침과 시트를 포함해서 89프랑이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차 뒤에 캬라반을 달고 가족 단위로 바캉스를 오는 호수를 포함한 커다란 공원 안에 있었기 때문에 경차와 공기가 좋았고 시설 또한 아주 깨끗하고 훌륭했다. 이곳에서 4일을 예약하고 이날 저녁엔 공원과 마을을 산책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밤기차에서 벨기에 중년남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나는 복도에서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었고 그 사람은 다른 컴파트먼트에 있었는데 혼자서 창가로 흐르는 풍경을 아쉬운 듯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졸려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자려고 들어갔는데 빙긋 웃는 것이다. 나도 기분좋게 웃어 주고는 자리에 앉아서 조금 있다가 눕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는 벨기에에서 치과 의사를 하고 있고 지금은 여행 중이라 했으며 10개 국어를 말한다고 자랑했다. 내가 일본인인 줄 착각하고 일본어로 뭐라고 이야기했는데 한국인인걸 알고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한국이 경제 대국이라고 말했고 서울올림픽도 알고 있었다. 얼마전 그는 중국에 몇 달 있었는데 아주 좋았다고 했다. 중국엔 가본 일이 없다고 하자 꼭 가보라고 했다. 그는 중간역에서 내리면서 좋은 여행이 되라고 했고 나는 자리에 누웠다. 

다음 날 아침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자 많은 숙박업자들이 와서 자기네 집에 민박하라고 귀찮게 했다. 오늘은 축제일이니 하룻밤 자고 가라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믿지도 않았고 내가 부다페스트에서 잡은 일정은 하루였다. 하지만 축제일이란 말은 사실이었고 볼거리도 많았다. 각국의 민속 무용단들이 거리 곳곳에서 춤을 추었고 다시 한 무대에 모여 나라별로 특색있게 놀았다. 프랑스의 민속 무용은 경쾌하고 코믹했다. 특히 러시아 무용단의 춤은 힘과 정열이 있었다. 무대가 부서질 듯 힘있는 발동작은 영화 ‘지붕위의 바이올린’ 의 한 장면을 생각나게 했다. 반나체 차림의 요란한 멕시코 무용단은 관중들에게 호응이 아주 좋았다. 무용단과 사람들은 판소리 공연하듯 거리낌없이 서로 어울렸는데 편안하고 즐거웠다. 축제의식이 있었고 주요 거리와 도나우 강변에는 사람들로 붐볐다. 하늘에는 2차 세계대전에나 등장했음직한 쌍날개 비행기들이 둔하고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느리고 편안하게 공중 곡예를 선보였다. 도나우 강변에 자리한 국회의사당 앞에선 강물을 가르는 신나는 제트보트 경주가 있었다. 그곳 사람들은 우리가 서양인 보듯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힐끗 쳐다 보았다. 밤이 되자 완전히 축제의 도가니였다. 사람들은 거리에 흘러 넘쳤고 여기 저기 연인들은 낯뜨러운 애무와 키스를 즐겼다. 모든 사람들이 즐기고 있었다. 나도 축제 분위기에 취해 이곳 사람들을 좀더 느끼고 싶었지만 많은 갈등 끝에 프라하행 기차 시간에 늦지 않게 서둘러 역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체코는 유레일패스를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체코 국경역에서 티켓을 사는 것이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었다. 티켓없이 돈으로 지불 할 경우 차장의 바가지 요금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국경까지 애써 잠을 참았다. 체코로 넘어 가는 기차의 승무원들은 살벌했다. 한밤중이었다. 화장실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열쇠로 문을 열더니 막무가내로 여권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는 허리에 총을 차고 있었다. 여권을 보이자 내 짐을 보자고 한다. 내 컴파트먼트로 돌아온 뒤 짐을 하나하나 다 뒤지기 시작했다. 다 꺼내라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샀던 포도주를 들어올리더니 알콜 도수를 유심히 살폈는데 한 병 뿐이냐고 묻는 눈이 무서웠다. 국경 근처에서 또다른 승무원이 문을 확 열더니 여권을 달라고 한다. 체코 돈도 보여 달라고 한다. 아무래도 도둑놈 같아서 믿기지 않아 망설였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여권을 보더니 한국인은 입국 할 수 없다고 눈을 부라리는데 깜짝 놀랐다. 다른 승무원이 오더니 둘이 한참 이야기하는데 이날 밤이 여행중 가장 무서운 순간이었다. 다른 승무원이 착오였다고 하면서 여권에 빨간색 잉크가 묻은 스탬프를 찍었다. 다행이었다. 벌써부터 공산 국가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괜히 온 것 아니냐는 생각만 들었다. 국경 역에서 급히 내려 티켓을 끊은 뒤 다시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가서는 안 될 곳같이 생각 되었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쏟아지는 잠에 어쩔 수 없이 눕고 말았다. 프라하에서는 기차에서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주 고풍스러운 옛 건물과 거리를 잘 간직하고 있는 도시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영어는 전혀 한마디도 통하지 않았다. 그 나라 말이 적힌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그들 말로 설명하는데 대충 감으로 알아차려야했고 여러번 물어야 했지만 민망할 정도로 친절한데 놀랐고 아주 소박한데에 놀랐다.     

오스트리아 짤스부르크에서의 일이다. 역에서 여권을 보이고 100실링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온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모차르트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은 많은 음악회가 열리는 곳이고 거리의 악사들 또한 많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로케이션 장소 몇 군데와 호엔 짤스부르크성, 미라벨정원 등을 돌아보았다. 짤스부르크는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발달되어서, 자전거는 대중교통 수단일 뿐 아니라 레저 생활에 필수적이었다. 자전거 도로는 강 양 옆에 2차선 직선으로 끝이 안보일 정도로 뻗어 있었기 때문에 보기에도 신선했고, 아침 저녁으로 신선한 수풀 사이로 강물에 반사되는 햇빛과 달빛을 즐기며 자전거 산책을 즐기는 이곳 사람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줄리엔드류스의 감미로운 도레미송이 울려 퍼지는 산과 아름다운 성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강변 도로를 따라 2시간을 쉬지 않고 달렸지만 끝이 없었고 결국 지는 붉은 해를 불안한 듯 느끼면 되돌아와야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의미 있는 곳중 하나인 짤스부르크의 사운드 오브 뮤직 로케이션 장소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불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비엔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저녁 8시 Rathausplatz에서는 리차드 바그너 Film festival이 있었다. 공원 안에 있는 이 광장에는 의자를 일렬로 둥글게 배열한 뒤 그 앞에 높고 웅장한 건물 중앙에 커다란 스크린을 설치한 후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 광장은 굉장히 컸기 때문에 야외 관람석 뒤쪽에서는 각국에서 온 듯한 임시 노천 음식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그 중앙에는 식탁과 의자를 배열했는데 그들은 모든 식기류를 공동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어느 음식점의 식기도 공원이나 주위 분수대로 이동이 가능했다. 음식 종류는 아메리카풍에서부터 중국요리까지 아주 다양했다.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음식점은 중국 요리에 정신이 없는 동양인 요리사들이 있는, 쌀을 주 원료로 사용하는 중국 요리점이었다. 보통 우리나라에서 먹는 음식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우리가 먹는 볶음밥 비슷한 음식이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정말 지루했다. 어제는 베토벤의 음악을 상영했다고 한다. 하루 먼저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운명이라 생각하고 야외 식당가를 한 바귀 돌면서 무얼 먹을까 고심했는데, 결국은 중국 요리에 관심이 끌릴 수 밖에 없었다. 다른 음식에 비해 좀 비싼 편이었지만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 용어로 small beer 한잔과 중국요리 한 접시를 들고 분수대 앞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걷는 동안 몇 번이나 음식을 쏟을 뻔했다. 공원 주변에는 어디에나 바그너의 음악이 흘러 넘쳤고 음식과 술 또한 흘러넘치고 있었다. 스크린이 건물에 높이 걸렸기 때문에 근처 어디에서고 볼 수 있었다. 빈은 정말 음악의 도시답다. 그들이 좋든 싫든 이 도시가 가진 이름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야외 음식을 먹으면서도 음악을 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 도시 사람들의 정서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될 것인가. 빈이 음악의 도시라는 타이틀을 고집하는 한 이 도시는 오랫동안 평온하고 아름다울 것이다. 강한 조명을 받으며 흩어지는 분수대의 물방울들을 보면서 느끼는 지배적인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25일간의 여행에서 얻은 것은 가치의 혼란과 진리의 부정, 외로움, 지속적으로 마음을 휘젓는 약간의 분노와 일종의 이유없는 반항심이다. 유럽 젊은이들은 그들 선조들이 이룩한 문명에 지치고 부담스러워 방황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명과 모든 진리라고 규정되어버린 것들은 앞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말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인간은 꾸미지 않은 순수함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다. 신에 대한, 자연에 대한 도전은 인간에게 있어 방황과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파리 사람들은 휴가철에 루브르박물관이나 미술관, 유적지를 찾기보다는 산과 바다, 자연을 찾아 밖으로 빠져나간다. 바캉스 철에는 파리 사람들이 남기고 간 텅빈 거리를 수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메우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긴다. 외국 관광객들이 허깨비를 보고 파리를 빠져나갈 때쯤이면 남국의 강렬한 여름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로 갓 씻은 물오징어처럼 몸과 마음을 바닷물에 맑게 씻은 채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역사의 순환에 더 이상 속지 않겠다. 이는 똑같은 일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보편적인 생을 마감하고 땅에 묻힌 영혼의 발자욱들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무의미한 짓이다. 모두가 역사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는 운명을 합리화하려 하고있다.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나만의 그림을 그리는 외에 어떤 것도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무엇엔가 미치도록 취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나서 처절히 역사의 수레를 짊어지고 그 옆에 나만의 젊은 날의 초상을 새겨야한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느강이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 아폴리네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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