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 - 시와 단상

 





절제라는 말을 잘 아는 사람은

정약용이 근검勤儉 두 글자를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준 이유를 알 것이다

검소함에 부지런함까지 더해졌으니 그 비싼 시간을 

싼 값에 살 줄도 알고 소중한 시간을 돈과 맞바꾸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현인들이 말해주지 않았던 절제에 숨겨진 비밀을 알았다

절제가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것을

인생의 풍요로움은 절제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것을

높은 절벽에 선 사람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선다

절제는 낮은 곳에 거居하는 덕으로

불안과 두려움이 거할 곳이 없게 된다

절제節制 검儉 절도節度 무소유無所有 중용中庸의 도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니

발걸음 한걸음도 함부로 내딛지 말아야 한다




절제는 삶에 여백을 마련하여 주는 것이니 그 안에서 쉴 수도 있고,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여건과 잠재력을 부여한다. 

들을만한 말은 장황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음악은 시끄럽지 않고, 

아름다운 숲은 또 좋은 그림은 빽빽하지 않다. 

절제 안에서 가난은 맑고, 절제 안에서 부유함은 넘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절제가 가진 덕은 우아함이다.     

절제란 무엇인가. 불필요한 것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 필요한가.

노자 《도덕경》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우리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를 생각해 보자. 

맨몸으로 나온다. 

인간의 성장기를 보자. 아무 생각 없이 놀던 어린아이를 거쳐 열심히 문명,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청·장년기, 그 이후의 시기는 보통 배운 것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굳게 다지며 살아가는데, 이 말 그대로의 기성세대는 진보적이기보다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가득 차면 담을 공간이 없고 변화에 대처하기가 어렵다. 스스로 덜어내어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데 안정을 좋아하는 마음은 보통 변화를 거부한다. 그런 면에서 비어 있는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어 변화에 능동적이고 사고가 유연하다.      


다음은 노자 《도덕경》의 내용이다.     


“갖고 있으면서도 그득 채우려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고,

날카로운 끝을 더 뾰족하게 만들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위 글에서는 날카로운 데에다가 날카로운 것을 더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정신을 오히려 흐트러뜨리고 번거로움을 하나 더하는 것이니 절제와 거리가 멀고, 

항상성(恒常性)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말한다.     

노자는 약한 것, 부드러운 것이 강하고 딱딱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어린 잎은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오래 살고, 모든 것들은 죽을 때 딱딱해진다. 

노자는 그런 면에서 부드럽고 틀에 따라 언제든 변화 가능한 물의 성질을 최고의

선(善)으로 여겼다. 

물은 사각형 그릇이나 둥근 그릇이나 어디든 담길 수 있는 부드러움과 유연함이 있다. 

인생에서 보면 언제나 웃고 항상성을 유지하는 순수한 어린아이가 물을 닮았다. 

약한 듯하지만 강하다.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     


《도덕경》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다. ‘지극한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다.     


다음은 《도덕경》의 내용이다.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나니,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땅처럼 낮은 곳에 거하고 마음은 

연못처럼 고요하며, 같이 어울릴 때에는 아주 인자하고, 말에는 신의가 있고 발라서 

잘 다스려지고, 일에는 매우 능란하고 움직임이 때를 잘 맞춘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물은 낮은 곳에 임하며, 만물을 이롭게 해주면서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가길 꺼리는 곳에도 편안히 머무는 덕을 가지고 있다. 

오직 다투지 않으므로 허물이 없다 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마음이야말로 절제의 덕을 잘 갖추고 있다. 낮은 곳에 임함으로써 

위치에너지를 낮춰 불안과 위험을 감소시킨다. 그래서 약한 듯하지만 강하고, 

위험에서 거리가 멀다.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조차도 아무 생각 없이 놀던 어린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위험에 무방비 상태이고, 사탕발림에 잘 속고, 어리석은 면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자 《도덕경》 해설로 유명한 왕필은 “갓난아이야말로 참으로 본받아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했다.     

다음은 《도덕경》 50장에 대한 왕필의 해설이다.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으면 되돌아가는데,

제대로 사는 이들이 열에 셋인데, 죽는 이들이 열에 셋인데,

잘 살다가 죽을 곳으로 가는 이들이 또한 열에 셋이 있다. 왜 그런가?

너무 잘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듣건대 삶을 잘 기른 이는 뭍을 다녀도 맹수를 만나지 않고,

전쟁터에서도 병기에 다치지 않는다고 한다.

외뿔소는 그 뿔로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으며,

무기는 그 칼날로 찌를 곳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죽을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창칼보다 해로운 도구가 없고, 외뿔소나 호랑이보다 위험한 짐승이 없다. 

그런데 창칼로 하여금 그 날 끝으로 찌를 곳이 없게 하고, 호랑이나 외뿔소로 하여금 

그 발톱과 뿔로 할퀼 곳을 없게 하니, 이는 참으로 욕심이 그 몸을 얽어매지 않게 한 때문이니 

어찌 죽을 곳이 있겠는가! 저 독충들은 연못이 얕다고 여겨 그 속에 구멍을 뚫고, 송골매는 

산이 낮다고 여겨 그 위에 둥지를 얹으니, 주살이 닿지 못하고 그물을 씌우지 못하니 

죽을 곳이 없는 곳에 거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달콤한 미끼에 걸려서 사지에 

빠져버리니 너무 잘 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물이 구하는 것 때문에 

근본을 떠나지 않고, 욕심으로 인해 참모습을 더럽히지 않으면, 비록 전쟁터에 들어가더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세상을 돌아다녀도 다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갓난아이야말로 

참으로 본받아 귀하게 여길 만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듯이, 너무 잘 살려고 하면, 불필요하게 늘리면, 죽을 빌미를 더 만들어 내기 

때문에 전쟁에서도 죽기 쉽고, 호랑이에게 물리기도 쉬우니, 삶에 불필요하게 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심 없고 욕심 없는 갓난아이야말로 본받을 만한 것이라 말한다.    

 

노자의 사상은 흔히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 이야기한다. 자연 상태에서 무엇을 더 덧붙이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도가(노자, 장자…)에서는 유가(공자, 맹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와 노자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관해서 물었다.     

노자가 말하기를, 

“그대가 말하는 그 사람들은 뼈와 더불어 모두 썩어버리고, 오직 그 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군자는 때를 얻으면 마차를 타고, 때를 얻지 못하면 떠돌아다닌다. 내가 듣기로는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이 감추어 두고 마치 빈 듯이 하고,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겉모습은 마치 어리석은 듯하다고 한다. 

그대는 교만한 기운과 많은 욕심, 잘난 체하는 태도와 잡념을 버리는 것이 좋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대 자신에게 무익한 것이다. 내가 그대에게 알려 줄 것은 이것뿐이다”라고 

했다.     

공자가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새가 잘 나는 줄을 나는 알고, 고기가 잘 헤엄치는 줄을 나는 알며, 짐승이 잘 달리는 줄을 

나는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싯줄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것은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가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용과 같았다”라고 했다.     


다음은 유가들의 사상을 공격하는 《도덕경》의 내용이다.     


“대도(大道)가 없어지니 인의가 드러나고, 

지혜가 나타나니 거짓도 생겨나게 되었다.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므로 효성이니 자애니 따지게 되고, 

국가가 어지러워지자 충신이 등장하게 되었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성(聖)을 끊고 지(智)를 버리면 백성들의 이익이 백 배가되고,

인(仁)을 끊고 의(義)를 버리면 백성들이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워지며,

교묘한 재주를 끊고 이로운 재물을 버리면 도적이 없어지나니,

이 세 가지는 예법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므로 소박함을 간직하고 사욕을 줄이는 데 매어놓게 

하라.”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인의예지 모두가 인위적이고 불필요한 것이라서 오히려 인간을 더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인위적 교육의 효과가 오히려 잘 있는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갓난아이나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상태가 도가의 무위자연에 가깝다면, 

그 이후 열심히 공부해서 마련한 모든 지적이고 관습적인 것들(인위적인 것들)은 유가의 

인의예지와 같은 교육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므로 유가에서는 나날이 학문을 통해 지식을 더해가는 것을 중요시하고, 도가에서는 

나날이 비워 어린아이에 가까워지는 것을 중요시한다.      

노자는 비워 놓아야 담을 수 있고, 빈 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물이 쓰임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유(有)는 무(無)로 인하여 쓰임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은 《도덕경》의 내용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으로 모여 있으되,

그 중심에 빈 구멍이 있음으로써 수레로 쓰여진다.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듦에 그 가운데에 빈 곳이 있음으로써 그릇으로 이용되며,

창문을 내어 집을 짓는데 그 속에 빈 공간이 있음으로써 집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유(有)는 무(無)를 이용해야 이롭게 쓰인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쉽게 말해 가득 찬 그릇은 무엇을 담는 용기로서의 쓰임이 없어 무용하듯이, 

집도 안의 공간이 비어야 방으로서의 쓰임이 있듯이, 유(쓰임이 있는 것)는 무(비어 있는 것)를 

이용해야 이롭게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많이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덜어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며, 이는 절제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우리는 삶을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 가진 것이 오히려 삶의 불편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고, 

우리의 귀한 시간을 빼앗아 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토 잇사이는 《언지록》에서 말한다.     


“물건이 하나 늘면 하는 일이 하나 더 늘게 된다. 하는 일이 하나 더 늘면 번거로움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다.” 

사토 잇사이 저, 노만수 역, 《언지록》, 알렙, 2017.    


《채근담》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은 일에 있어 일분(一分)을 줄이면 곧 일분을 벗어날 수 있으니, 사귐을 줄이면 곧 

시끄러움을 면하고, 말을 덜면 곧 허물이 적어지고, 생각을 덜면 곧 정신이 소모되지 않고, 

총명을 덜면 곧 본성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날로 줄이기를 구하지 않고 날로 더하기만 찾는 

이는 일생을 스스로 속박하는 것이다.”     

홍자성 저, 《채근담》, 문예출판사, 2010.


위 글에서 번거로움과 속박의 의미는 아주 중요한 가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시간의 개념이다. 시간을 낭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위에서 말한 대로 간소화 하는 것, 덜어내는 것이 절제라고 한다면 그것의 이익은 무엇인가. 

내가 깨달은 바는 시간과의 관련성이다. 절제는 물건이나 돈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아끼고 시간을 버는 것이다. 많은 현인들이 절제를 중요시 했지만, 시간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숨겨진 비밀과도 같았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 대단한 발견이었다. 

절제라는 덕목은 시간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 한해서는 최고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뛰어난 인재였지만 삶의 대부분을 유배지에서 보냈다.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두 아들에게 항상 바라는 바는 다산 스스로 말하길 

‘벼슬길에 나갈 수 없는 폐족(廢族)’이지만 선비로서 학문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다산의 가족은 가난했기 때문에 이 무렵 아들이 학문을 멀리하고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그는 한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다산은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다.

‘근, 검(勤儉) 두 글자를 유산으로’라는 제목이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다음은 편지의 일부이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줄 밭뙈기 정도도 장만하지 못했으니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이제 너희들에게 물려주겠다.

너희들은 너무 야박하다고 하지 말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 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 처지를 극복하는 방편만이 아니라,

귀하고 부유한 사람 및 복이 많은 사람이나

선비들의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유지해 가는 방법도 된다.

근과 검, 이 두 글자 아니고는

손을 댈 곳 없는 것이니 너희들은 절대로 명심하도록 하라.”     

정약용 저, 박석무 편역,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창비, 2009.


다산은 부지런함과 절제로서 시간을 버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문에의 길을 

멀리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들들이 절제의 가치와 이로움을 잘 알았다면 

글자 두 자의 유산에 결코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은 아들들이 가난을 극복하고 학문의 길을 가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가 아들들에게 두 

글자를 유산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근, 검 즉 부지런함과 절제의 덕목은 

선비의 길을 가는 데 튼튼한 버팀목이 되기 때문이다. 선비에게는 시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다산은 잠자는 시간 말고는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시간이 짧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다음은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세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나니, 하나는 자애로움이고, 둘은 검약함이고, 

셋은 감히 천하의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애로우므로 용감할 수 있고, 검소하므로 넉넉할 수 있고, 감히 천하에 앞서지 않으므로 

웃어른이 될 수 있다. 지금 사람들은 자애로움을 버리고 용맹하기만 하며, 검약할 줄 모르면서 

헤프게만 하고, 물러섬 없이 앞장서려고만 하니 죽음에 이를 것이다.”

왕필 저, 임채우 옮김, 《왕필의 노자주》, 한길사, 2008.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리된다. 

만약 하루의 3분의 2 정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가 정치가이든 상인이든, 혹은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욱 옮김, 《니체의 숲으로 가다》, 지훈, 2004.

 

자기의 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신분에 상관없이 그는 그저 노예일 

뿐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간에 매인 자는 돈의 노예이거나 물건 또는 사람의 노예인 것이다. 

물론 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 한해서다.

소크라테스는 한가함을 인간의 소유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절제가 어떻게 시간을 버는가.

우리 시대에도 절제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 주식투자가 워런 버핏,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등은 잘 알려진 저명인사들이다.      

스티브 잡스는 늘 검정색 터틀넥에 청바지를 입었으며, 저커버그의 옷장에는 회색 티셔츠만 

20벌 걸려있다고 한다. 워런 버핏은 아직도 몇 십 년 된 자동차와 오래 살던 집에 살고 있으며, 

아침 식단 가격은 대부분 3.73달러 이하로 맥도널드를 애용한다고 한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부자들이다.      


스티브 잡스에게 왜 똑같은 옷을 입느냐고 물었을 때, “그냥 편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크 저커버그는 똑같은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일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옷을 코디해서 입는 것이 집중력을 흐트러뜨릴 뿐이다. 

나는 내 모든 에너지를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데 쏟고 싶다.”   
                    

이들은 왜 이런 절제된 삶을 살고 있을까. 물론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것이다. 돈을 쓰는 기쁨보다는 시간을 버는 기쁨을 아는 것이다. 

돈을 쓰는 것도 시간이 소비되므로.     

옷을 하나 산다고 가정해 보자. 우선 옷을 골라야 할 것이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열심히 검색 또는 매장을 다녀야 한다. 드디어 옷을 골랐다. 이제 기다리거나 집에 가져와서 

포장을 뜯고, 빨래를 하고, 널고, 걷어서 옷장에 넣어야 한다. 옷장의 공간을 마련해야 하고, 

옷걸이도 하나 있어야 할 것이다. 옷 하나 샀을 뿐인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되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다. 아침에 옷을 입고 나가려 할 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갈등에 하나가 

더 첨가되었다. 고르는 데도 시간은 흘러간다. 결국 옷 하나 샀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어마어마한 노력이 든다. 나비효과와 같다.      

물론 옷을 좋아하고 소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마저도 즐거움일 수 있다. 

이는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전제로 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절제되지 않은 삶은 시간도 빼앗길 뿐만 아니라 정신도 흐트러뜨린다.

절제의 덕에 따르는 삶이라면 발걸음 하나, 사소한 손동작 하나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자들의 절제와 가난한 사람들의 절제는 다른가.

다르다. 부자들은 단지 시간을 더 벌 뿐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덤으로 경제적으로 

더 넉넉해질 수 있다. 절제의 덕에 의하면 불필요한 것은 덜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게 된다. 다 가지려고 하면 가난한 사람이지만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선택해서 집중하면 못가질 것도 없다.      

그런데 현대 사회, 특히 우리나라는 많은 사람들이 돈을 버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어, 

삶의 한 수단인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절제의 미덕을 배울 필요가 있다.


Yolo족이라고 있다.(You only live once.)

아끼고 모아 부자가 되는 시대는 지났으며, 지금 가진 것으로 삶을 풍요롭게 만들겠다는 

태도로 이들은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이들의 삶은 미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다. 

이들에게 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적게 소유하는 삶을 통해 만든 시간의 여유를 하고 싶은 일이나 여행, 취미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절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절제의 또 다른 장점은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 버리고 간소화함으로써 삶을 넉넉하게 

하는 것이므로, 경쟁과 불안으로부터 점점 멀리 떨어지게 되며, 시간은 우리의 것이 된다.  

   

“아주 좋은 차(茶)만을 구하지 않으면 차 주전자는 항상 마르지 않을 것이요, 향기로운 술만을 

구하지 않으면 술 단지는 비지 않을 것이다. 꾸밈없는 거문고는 줄이 없어도 항상 고르며, 

짧은 피리는 구멍이 없어도 절로 즐거우니, 비록 복희씨보다는 못할지라도 죽림칠현과는 

벗할 수 있을 것이다.”    

홍자성 저, 《채근담》, 문예출판사, 2010.

 

그렇다면 절제만 중요하고 많이 가진 것 자체가 나쁜 것일까.

아니다. 단지 마음가짐의 문제일 뿐 현인에게는 부(富)가 하나의 좋은 수단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세네카는 말하고 있다. 

많이 가진 사람도 절제를 실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인도의 가혹한 요가 수행자처럼 일부러 부를 멀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석가모니는 스스로가 그런 고행(苦行)을 실천하다가, 물질을 멀리하려고 하는 그 마음 자체가 

집착이므로 그런 집착의 마음조차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물질 자체는 수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보리수 아래에서 열반에 든다.


절제된 삶은 우리에게 시간이란 귀한 선물을 주고, 두려움을 감소시켜 현재를 오롯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넉넉한 여유를 주며, 불안을 낮춰주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절제는 미래를 예비(미리 준비)함 없이 그날그날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덕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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