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행복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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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란 무엇인가.
답이 있다면 자기 삶에 대한 만족감일 것이다.
행복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의 권리이다.
우리는 과정보다 결과에 치우친 삶을 산다. 행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있다. 결과는 알 수 없는 단순한 미래일 뿐이다. 삶은 과정이다.
행복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에 있다. 하고 싶은 것에는 여러 가지 제약들이 따르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용기가 있어야 시작이란 것을 할 수가 있다. 시작이 정말 중요한 것이다.
플라톤은 시작이 반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용기가 없으면 시작부터가 없다. 시작이 없는 것은 꿈이 없는 것과도 같다.
시작을 하면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이 과정은 자신이 선택한 과정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없다. 행위 자체가 행복이 된다.
당신이 시작만 한다면 행위 자체가 행복한 과정에 들어서게 된다.
성공과 결과는 이미 중요치 않다. 당신은 이미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의 삶의 행복은 과정에 있으며, 결코 그 결과에 있지 않다.
성경은 말한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행복은 스스로의 용기있는 의지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여러분의 선택을 믿어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탈무드는 말한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 산다.”
백범 김구는 행복의 조건을 높은 문화의 힘이라고 했다. 문화를 통해 우리 스스로 행복해지기도 하지만 인류에게 행복을 나눠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지금 부족한 인의, 자비의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라고 보았는데, 신기하지 않은가?
김구의 <나의 소원>이 현재 우리나라에서 실현되고 있으니 말이다.
BTS가 빌보드 차트 1위를 하고,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아카데미상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요즘 우리나라 문화 체육계는 이미 세계적인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영화, 체육, 음악 부문에서 이미 세계적이다.
문학 부문에서 세계적인 작가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러면 백범 김구 선생님이 그렇게도 원하던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백범 김구 <나의 소원>의 일부분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 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 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 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2002.>
인류의 불행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인의 사랑 자비의 마음을 기르는 것은 오직 문화라고 하였다. 위대한 말이다.
그의 사랑은 우리 민족애에 머물지 않은 온 인류적인 사랑이었으며, 인류의 행복은 문화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서히 그가 바라는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백범 김구의 소원과 다르지 않다. 사랑을 나누고 공유하는 힘은 문화에 있다고 믿는다.
정신적 가치가 높은 행복, 나만의 행복에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행복으로 확장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말이다.
남과 나를 동일시 하는, 하나 되는 마음에서 오는 사랑의 마음이 행복의 기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체게바라의 혁명정신 또한 사랑을 기반으로 한다. 그는 자신의 어린 자녀들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 어떤 사람을 향해 저질러지는 불의이건 간에 너희의 존재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혁명가의 가장 아름다운 품격이다.”
<후안 마르틴 게바라, 아르멜 뱅상 저, 민혜련 번역, 《나의 형, 체 게바라》, 홍익출판사, 2017.>
체게바라처럼 투철하게 인간에 대한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준 철학자는 없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연민하는 사람. 그는 지구 반대편까지 인민의 자유를 위해 소총 한 자루 메고 싸우러 갔다.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도 있었고, 시인이나 독서광으로서의 고독하고도 달콤한 삶을 살 수도 있었던 그는 왜 총을 들었을까.
그는 불의를 말없이 인내하며 고통받는 사람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렸고,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그의 죽음은 세상 곳곳에 많은 열매를 맺었고, 아직도 우리 기억 속에 살아 있으며, 계속 살아갈 것이다.
다음은 요한복음(12:23-25)에 나오는 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우리는 행복할 권리를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 행복한 삶은 먼저 자기 정체성을 갖춘 삶이어야 한다. 복제품과 같은 삶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자신의 기질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이 노예인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을 빌려 세상을 보는 사람, 인생의 주어진 시간을 자기 맘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노예의 삶을 사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리된다.
만약 하루의 3분의 2정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가 정치가이든 상인이든, 혹은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저, 김욱 역, 《니체의 숲으로 가다》, 지훈, 2004.>
루소는 ‘에밀’에서 말한다.
“자연과 사회제도 사이에서 투쟁하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이 되느냐, 시민이 되느냐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인간인 동시에 시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연인은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한다. 그는 하나뿐인 통일체로서 오로지 자신과 비교되는 절대 완전체이다. 시민은 분모에 의존하는 분수들이 지닌 통일성만 가질 따름이다. 시민의 가치는 사회 조직이라는 전체와 맺는 관계로 결정된다. 좋은 사회제도는 인간의 타고난 성질을 어떻게 바꿀지, 인간에게서 어떻게 절대 실존을 빼앗고 상대 실존을 부여할지, 절대 실존으로서 나를 어떻게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들지 아주 잘 안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자신을 더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통일체의 일부라고 믿으며, 전체의 일부가 아니라면 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
로마 시민은 카이우스도 루시우스도 아니다. 로마 시민은 로마인일 따름이다. 시민 질서 안에서 자연에 품는 감정과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싶은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 언제나 자신과 모순을 일으켜 갈등에 빠지고, 언제나 자신의 자연적 경향과 시민으로서 의무 사이에서 표류하므로, 인간이 되지도 못하고 시민이 되지도 못한 채 떠돈다. 그는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이 못 되고, 타인에게도 좋은 사람이 못 된다. 그는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한 시민, 그러니까 프랑스인, 영국인, 자본가가 될 터이다. 마침내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되리라.”
<J. J. 루소 저, 정봉구역, 《에밀》, 범우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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