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변화에 대하여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변화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의 본성 가운데 변화보다 더 사랑스럽고 친근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무가 변하지 않는다면 너는 더운물에 목욕할 수 있는가? 음식물이 변하지 않는다면 너는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가? 그 밖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변화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너 자신의 변화도 그와 똑같은 것으로 보편적 본성에는 똑같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는 보지 못하는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이동진 옮김, 《명상록》, 해누리, 2009.>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변화를 긍정했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은 늘 변화를 두려워하면서 불안을 안고 살아왔다.

우리의 현실은 변화무쌍하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불안과 두려움은 떠날 날이 없다.

그리하여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주역(周易)’에서는 변화를 가정하고 상황의 변화에 따른 대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역(易)은 변화를 뜻한다.


‘주역’은 양(陽)을 상징하는 효(━)와 음(陰)을 상징하는 효(--) 둘을 사용해 64괘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수학적 구조인 이진법 또한 이진수라 불리는 0과 1 두 개의 숫자만을 이용하여 모든 수를 표현한다.

이진법은 17세기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라이프니츠가 팔괘(八卦)와 같은 동양의 음양 사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최초로 고안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역’의 원리에 영감을 받아 컴퓨터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니 놀라운 일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에는 무엇이 들어 있든지 0과 1로 된 숫자들의 집합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프로그램을 돌리면 무한히 다양한 그림과 음악, 게임, 영상, 사진 등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주역’이 음양의 두 가지 상징으로 구성되지만 그것의 다양한 결합과 그 해석에 의해 우주와 인간에 대한 모든 현상이 설명되는 것과 같다.


태극(또는 무극)은 음과 양을, 하늘과 땅을 낳고 그 안에서 만물을 낳는다. 이것이 동양철학이라면, 현대과학이 낳은 2진법 체계(0과 1)인 디지털과 컴퓨터는 구현 못 하는 것이 없으니, 이 또한 만물을 낳는다고 봐야 한다.

‘주역’은 현대 과학과도 자연의 이치와도 너무나 닮아 있다. 그래서 과학적이다.


공자가 ‘주역’ 책을 묶은 끈이 세 번 끊어지도록(위편삼절 韋編三絶)읽은 것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어서일 것이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도 전투할 날짜를 정할 때 ‘주역’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실생활에 적용 가능했다는 얘기가 아니겠는가.

과학자 닐스보어는 ‘주역’과 양자역학의 이원적 특성이 같은 것에 감명받아 노벨물리학상을 받을 때 팔괘가 새겨진 옷을 입었다고 한다.      


변화는 기의 흐름에서 시작된다. 기의 흐름이 전혀 없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인 태극에서 기가 움직여 음과 양을 낳았다.

기의 흐름이 없었다면 음과 양의 존재도 없었을 것이고, 남녀의 사랑도 없고, 전구에 불을 켤 수도 없다. 변화, 즉 기의 흐름, 음과 양의 변화와 조화에 따라 사랑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결국 하나 됨의 노력이다. 우리는 사랑할 때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가. 그처럼 하나 될 때 인간은 행복할 것이다.


“현존하는 사물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지 항상 생각하자. 세상만물은 마치 강물이 흐르듯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그 변화의 원인 역시 끊임없이 변화한다. 세상에 고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체만물은 눈앞에 펼쳐진 과거와 미래 속으로 눈 깜짝할 사이 사라진다. 그런 상황에서 제 홀로 득의양양해 하거나 혹은 고통이 영원히 지속될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이동진 옮김, 《명상록》, 해누리, 2009.>     


변화가 인간을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하므로 다시 하나(태극이나 무극 상태)로 돌아가려 하는 노력이 종교이며 철학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이상,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변화에 고통스러워하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만약 변화가 없다면, 둘이 아닌 하나만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을 것인가. 그렇지만 변화는 인간을 또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런 이율배반적인 세상에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법은 변화를 인정하고 다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혼돈을 즐겨라. 삶은 불안정하다. 이것은 삶이 자유롭다는 의미이다. 삶이 안정적이라 함은 곧 그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거기에 자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내일을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흘러라. 느긋한 마음으로 혼돈을 즐겨라.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되는 법이다. 그대가 변화를 받아들이면 매 순간 그대에게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이 찾아올 것이다. 그대는 매 순간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오쇼 라즈니쉬 저, 나혜목 옮김, 《틈: 오쇼 라즈니쉬가 전하는 삶의 연금술》, 큰나무, 2004.>     


니체의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Amor Fati(Love of Fate).”


다가오는 모든 운명을 사랑하자(변화를 긍정하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불안도 없을 것이다. 변화는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하나 되면 변화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결론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

하나 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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