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용서에 대하여

 용서란 무엇이며, 용서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용서란 용기있는 자의 사랑이다. 인간은 불완전함을 전제로 함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공자는 인(仁), 맹자는 측은지심, 석가는 자비, 예수는 사랑, 묵자는 겸애를 주장했다.

성경에서는 적조차도 사랑하라 말한다. 어떻게 적까지 사랑할 수 있는가.


칼릴 지브란은 그의 저서 ‘예언자’에서 “네 손을 거쳐가지 않은 악이란 없다.” 라고 말한다.     


“그대들 자신이 곧 길이며 또한 길 가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대들 중 누군가가 넘어진다면 그것은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걸려 넘어지는 돌이 거기에 있음을 경고하기 위해.

그렇다, 그는 또한 자기보다 앞서 가는 이들을 위해 넘어지는 것이다. 비록 빠르고 확실한 걸음으로 앞서 갈지라도 아직 그 돌을 치우지 않은 이들을 위해.


또 이 말이 비록 그대의 가슴을 무겁게 할지라도 이 역시 사실이다.

죽임을 당한 자, 자신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자신의 도둑맞음에 비난받을 점이 없지 않다.

정의로운 자, 악한 자의 행동에 완전히 결백하지 않고

정직한 자, 중죄인의 행위에 결코 깨끗하지 않다.

그렇다, 죄인이란 때로 피해자의 희생물이다.

나아가 죄인이란 때로 죄 없고 잘못 없는 자의 짐을 대신 지고 가는 자이다.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악한 자와 선한 자를 나눌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검은 실과 흰 실이 함께 짜여지듯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으므로.

만약 검은 실이 끊어지면, 천 짜는 이는 헝겊 전체를 들여다봐야 하고 베틀까지도 조사해야 한다.


그대들 중 누군가가 부정한 아내를 재판하고자 한다면

그 남편의 마음도 저울에 달아 보고 그의 영혼도 자로 재어 보라.

또 죄인을 채찍질하려거든 그 피해자의 정신도 들여다 보라.

그대들 중 누군가가 정의의 이름으로 벌을 내려 악의 나무에 도끼를 대려 한다면, 그 나무의 뿌리도 살펴보라.

그러면 분명 선한 것과 악한 것, 열매 맺는 것과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의 뿌리가 대지의 말 없는 가슴속에 함께 뒤엉켜 있음을 알게 되리라.

또 그대, 공정히 재판하려는 자여, 비록 육체적으로는 정직하나 정신적으로는 도둑인 자에게 그대는 어떤 판결을 내릴 것인가?

또한 육체적으로는 살인자이나 정신적으로는 그 자신이 죽임을 당한 자에게 그대는 어떤 형벌을 내릴 것인가?

또 어떻게 고발할 것인가? 그 행동으로는 남을 속인 자요 억압한 자이지만,

그 자신 역시 학대받고 모욕당한 자를.


그리고 저지른 죄보다 뉘우침이 이미 더 큰 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뉘우침이란 무엇인가? 그대가 기꺼이 따르는 그 법이라는 것을 통해 정의를 집행하는 것도 바로 뉘우침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가?

하지만 그대는 죄 없는 이에게 뉘우침을 심어 줄 수 없고, 또한 죄 지은 자의 가슴으로부터 뉘우침을 끌어낼 수도 없다.

누구의 명령 없이도 뉘우침은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고 스스로를 응시하게 한다.

그러므로 정의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여, 모든 행위를 완전한 빛에 비춰 보지 않고 어떻게 정의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런 다음에야 그대는 알게 되리라. 똑바로 서 있는 자와 넘어진 자는, 사실은 자신의 난쟁이 자아의 밤과 신적 자아의 낮 사이 희미한 빛 속에 서 있는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 사원의 돌기둥이 바닥에 놓인 주춧돌보다 더 높지 않다는 것을.”

<칼릴 지브란 저, 류시화 옮김, 《예언자》, 무소의뿔, 2018.>


그렇다. 우주는 명, 암이 있고 밤, 낮이 있고 음, 양이 있고 흔히 말하는 선, 악이 있다고 하지만, 선은 악의 희생을 먹고 산다. 선은 악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관여하지 않은 악이란 없다.

그러므로 용서할 수밖에 없다.

누가 장발장을 만들었는가. 빵을 나누지 않았던 선이었다.

누구나가 그 자리에 서면 장발장이 될 것이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악은 나쁜 것이라기보다도 지나치거나 모자란 것이다.


다음은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명도(程明道)의 말이다.


“선은 물론 인간의 본성이다. 악도 역시 본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천하의 선악은 모두 천리(天理)인데, 이 악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래는 악이지 않고, 단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이다.”

<사토 잇사이 저, 노만수 역, 《언지록》, 알렙, 2017.>


마하트마 간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검은 것은 깨끗하지 않고, 흰 것은 깨끗하다 여긴다. 그러나 검은 것도 자연의 배치 속에서는 흰 것이나 다름없이 덕이 되고, 제자리를 잃을 때 악이 된다.”

<함석헌 저, 《함석헌 저작집 27권(예언자, 사람의 아들 예수, 날마다 한 생각)》, 한길사, 2009.>     


그대가 똥을 밟았을 때, 그 똥을 악이라 하지 말라.

그대 삶을 위해 헌신하고 남은 것이며, 또한 땅에 뿌려지면 생명에 무한한 힘을 주는 양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 가릴 것 없이 모두에게 비를 뿌린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모든 만물은 차별할 수 없는 자연이고, 한 몸인 것이다.

우주, 자연은 하나 됨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우주, 자연의 한 부분이다. 어떤 것도 버려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결핍의 존재인 모든 것들을 연민과 사랑으로 용서할 수밖에 없다.


함석헌 선생은 말한다.


“조명탄은 양쪽(아군과 적군)에 다 같이 빛이 되듯이, 참 속에는 옳은 것 그른 것이 다 같이 서는 것이고, 사랑 안에는 선한 것 악한 것이 다 하나로 살 수 있습니다.”

<함석헌 저, 《함석헌 저작집 29권(간디 자서전》, 한길사, 2009.>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말한다.


“인간은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

그러니 가르치거나, 아니면 참아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저, 이동진 옮김, 《명상록》, 해누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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