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베풂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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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베풀어야 하는가.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큼을 아는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왜일까.
중생을 구제 해야할 석가모니가, 일하지 않는다는 불성실함의 비난을 들으며, 오히려 구걸을 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베품의 기쁨을 알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자비를 베푸는 기쁨의 경험을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은 물론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다.
다음은 마하트마 간디의 저서에 나오는 말이다.
나낙은 말한다. “네가 남에게 무엇을 주든지 그것은 다 네 것이며,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네 것이 아니다.”
<함석헌 저, 《함석헌 저작집 27권(예언자, 사람의 아들 예수, 날마다 한 생각)》, 한길사, 2009.>
가지고 있음에 기쁨은 없다. 주었을 때의 기쁨이 소유의 기쁨보다 더 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너와 나, 우리가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 것이고, 장자의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는 것도 알 것이고, 선과 악이 따로 없다는 것도 알 것이고, 우주에 삶과 죽음이 따로 없음도 알 것이다.
자연이 균형을 갖추고 생태계를 유지하듯, 인간은 베풂을 통해 스스로의 삶도 유지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세상의 불안과 혼란을 줄일 수 있다.
빵 한 조각 나눌 수 있는 마음만이라도 있다면 장발장은 없을 것이며, 사회는 더 안정적이고 따뜻해질 것이다.
이는 자연이 스스로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여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과도 같다.
베풂에 대한 칼릴 지브란의 통찰과 비유는 탁월하다.
“대지는 그대들에게 자신의 모든 열매를 허락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다만 어떻게 손에 넣을지 안다면 결코 부족함이 없으리라.
풍요와 만족은 대지의 선물을 서로 잘 교환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 교환이 사랑과 부드러운 정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어떤 자를 탐욕으로, 어떤 자를 굶주림으로 이끌 뿐......
그러므로 그대들이 장터를 떠나기 전에 보라,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가 없는가를.
대지를 주관하는 영은 그대들 중 지극히 작은 자의 필요까지 다 채우기 전에는 바람 위에 평화롭게 잠들지 못한다......
그대가 가진 것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주는 것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줄 때이다.
그대가 가진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일 부족할 것을 염려해 간직하고 지키는 것일 뿐.
또 내일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순례자들을 따라 성지를 다니며 흔적도 없는 모래밭에 뼈다귀를 묻어 두는 겁 많은 개에게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 것인가?
부족할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이미 부족함이 아닌가?
집에 우물이 가득 찼어도 목마를까 봐 두려워한다면, 그 목마름은 영원히 채울 길이 없다.
세상에는 많은 것을 가졌으나 조금밖에 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은 주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숨은 욕망이 그 선물마저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가진 것이 별로 없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전부를 주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생명을 믿고, 생명의 아낌없이 줌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주머니는 결코 비는 법이 없다.
세상에는 또 기쁨으로 주는 이들이 있으니, 그 기쁨이 바로 그들의 보상.
또한 고통 속에서도 주는 이들이 있으니, 그 고통이 바로 그들의 세례.
그러나 주되 고통도 모르고, 기쁨도 추구하지 않으며, 선을 행한다는 생각도 없이 주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마치 저 골짜기의 소나무가 허공에 솔향을 날리듯 그렇게 준다......
그리고 아낌없이 주려는 이에게는 받을 사람을 찾는 기쁨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크다.
그대가 아낄 것이 무엇인가?
그대가 가진 것은 모두 언젠가는 다 내줘야만 하는 것.
그러므로 지금 주라. 때를 놓쳐 그대의 뒷사람이 주게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이 주라.
그대들은 자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주리라. 그러나 오직 받을 자격이 있는 자에게만.’
그대 과수원의 나무들, 그대 목장의 가축들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준다. 주지 않고 움켜쥐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밤과 낮을 맞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면 그대에게서 무엇이나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바다에서 마실 만한 사람이면 그대의 작은 시냇물로 충분히 잔을 채울 만하다.
또한 받아 줄 줄 아는 저 용기와 자신감, 아니 그보다도 받아 주는 저 너그러움 외에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한가?
그런데 그대는 어떤가? 남의 가슴을 찢고 자존심을 발가벗겨서, 바닥에 떨어진 그들의 가치와 온통 발가벗겨진 자존심을 구경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먼저 그대 자신이 줄 자격이 있는가, 주는 심부름꾼이 될 자격이 있는가를 물어보라.
진실을 말한다면, 생명이 생명에게 주는 것이니, 스스로를 주는 자라고 생각하는 그대는 하나의 증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대들 받는 이들이여, 물론 그대들 모두는 받는 이들이지만,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말라. 그것이야말로 그대들 자신에게나, 주는 이에게나 굴레를 씌우는 일이므로,
그보다는 주는 이와 함께 그의 선물을 날개 삼아 날아오르라.
자신이 진 빚을 지나치게 염려함은, 아낌없이 주는 대지를 어머니로 삼고 신을 아버지로 삼은 그의 너그러운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기에.”
<칼릴 지브란 저, 류시화 옮김, 《예언자》, 무소의뿔, 2018.>
주고 받는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사는 법을 보자. 열매는 뿌리에게 주어야하고, 뿌리는 열매를 받아 먹어야 나무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열매는 떨어져 베풀어야 하고, 뿌리는 받아야한다. 열매가 뿌리에게 너도 나처럼 베풀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뿌리는 받아야 사는 것이고, 열매는 주어야 다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나무의 삶 자체가 자연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다.
“그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준다. 주지 않고 움켜쥐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윗글 부분 인용)
윗글에서 주는 자에게는 “그대 자신이 줄 자격이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하면서, 받는 자에게는 “받아 주는 너그러움 외에 무슨 자격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한다.
또한 자신이 받은 것을 지나치게 미안해 함은 아낌없이 주는 대지를 어머니와 같이 믿고, 신을 아버지와 같이 믿고 있는 주는 자의 너그러운 마음을 의심하는 일이므로 당당히 받으라 말한다.
강물이 흘러 흘러 바다가 되면, 강물은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결국 하나가 된다. 자연 안에서, 우주 안에서 주는 자와 받는 자는 따로 없어지는 것이다. 하나 됨이 우주의 법칙인 것이다.
바다는 얼마나 평온한가. 그 곳에는 다툼도 갈등도 죽음도 자신의 이름도 없다. 파도는 포말이 되어 사라지지만 바다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우주와도 같다.
자연의 법칙은 언제나 zero sum이다. 잃거나 얻거나 총합은 언제나 같다. 장자의 조삼모사, 천하를 천하에 숨긴다는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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