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고통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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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란 안일함에 대한 저항, 권태에 대한 저항, 부패에 대한 저항,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다.
흘러가는 물의 작용과 같아서 씻겨 내려감이며, 늘 새로워 지려는 노력이다. 긍정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괴로움과 불쾌함을 동반하는가.
고통은 우리 몸과 마음에 일종의 경고 싸인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는 고통이 우리 몸과 정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이기 때문인 것이다.
항상성(恒常性)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몸을 평상시대로 온전하게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작용이다.
하지만 세상과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서 우리 몸과 마음도 변화에 적응해야만 할 것이다.
환경의 변화와 마음의 변화는 늘 있게 마련이며, 이 변화는 항상성에 의해 저항을 받아, 우리 몸이 바이러스에 강하게 대응하듯이 우리에게 고통과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다.
변화를 부정한다는 것은 삶을 부정한다는 것과도 같기에, 고통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제발 불사신들이 우리 마음에 박차로 쓰는 것들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재앙은 미덕에게는 기회라오. 너무나 큰 행복으로 나른해진 자들, 잔잔한 바다 위에서처럼 나태한 평온에 사로잡힌 자들은 불행하다고 불려 마땅할 것이오. 무슨 일이 생기든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이오. 잔혹한 운명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무겁게 짓누르지요. 멍에는 부드러운 목덜미에게는 무거운 법이오. 신병은 부상을 생각만 해도 파랗게 질리지요. 고참병은 대담하게 자신의 피를 보는데, 피를 흘린 뒤에는 종종 승리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요.”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저, 천병희 역, 《인생이 왜 짧은가》, 숲, 2005.>
하지만 변화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야 바람직할 것이다.
‘주역’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궁하거나 막히면 곧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
긍정적 변화는 막힌 것을 트기 위한 몸부림이며, 고인 물을 터주는 것과도 같다. 트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궁하거나 막힌 것이 트이는 과정에서 고통을 동반하지만, 트인 이후에는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삶은 발전하고 새로워지며 다시 그에 맞는 항상성을 마련할 것이다.
이렇듯 항상성이란 것도 계절의 변화처럼 항상 새로워짐으로 인해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다. 습관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더없이 좋은 것이지만, 변화에 저항력이 크다. 그래서 변화의 속도가 빠른 현대 사회는 고통의 회수가 늘고 그 주기가 빨라져 많은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고통은 변화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능동적이지 못하면 병을 키우듯 고통의 크기를 점점 키우기도 한다.
봄이 여름을 거부하고, 여름이 가을을 거부하고, 가을이 겨울을 거부하고, 또 겨울이 봄을 거부한다면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도 같다.
칼릴 지브란은 말한다.
“그대의 고통이란 그대의 깨달음을 가두고 있는 껍질이 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 내면의 의사가 그대의 병든 자아를 치료하는 쓰디쓴 약과 같다.”
<칼릴 지브란 저, 류시화 옮김, 《예언자》, 무소의뿔, 2018.>
계절적으로 네 번의 혁명 같은 변화가 자연에 있듯이 인생에도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허물 벗는 뱀이나 애벌레처럼 혁명과도 같은 시기가 각자에게 있을 것이고, 우리는 변화에 대한 몸부림으로 고통을 느끼게 될 테지만, 그 고통은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할 것이다.
알에서 깐 병아리같이, 껍질 벗은 매미처럼 한여름을 시원하고 장쾌하게 울고야 말 것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연약한 인간을 말살해 버리는 외부의 고통도 결국 살아남게 될 인간에게는 영양제에 불과하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코 고통을 아픔이라 부르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니체와 고흐》, 스타북스, 2020.>
고통이란 계절의 변화를 위한 새로운 습관을 위한 학습과정이며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의 역경은 정말 축복이었습니다.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기에 ‘미운오리 새끼’를 쓸 수 있었습니다.” (안데르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이전과의 그 경계선에 고통은 위치하는 것이다.
변화에 적응하면 그때부터는 다시 그 변화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고통은 사라진다.
고통은 처음에는 경고 싸인이었지만, 변화된 환경이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우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인 것이다.
세네카는 말한다.
“자네가 인생에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개인적인 사정이나 공적인 사정으로 풀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올가미에 걸려들었다고 가정해보세. 올가미에 걸린 사람은 처음에는 거추장스런 올가미를 간신히 견디지만 일단 그것을 화내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필연은 용감하게 견디는 법을 가르치고 습관은 쉬이 견디는 법을 가르친다는 점을 명심하게나. 자네는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과 휴식과 쾌락을 발견하게 될 것이네.
자네가 불쾌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말일세.
자연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도록 태어난 줄 알고는 불쾌한 일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습관을 만들어내어 가장 어려운 일에도 금새 친숙해지도록 만들었네.
그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호의라고 할 수 있네.
불행이 처음 우리를 가격했을 때와 같은 기세를 계속 유지한다면 견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저, 천병희 역, 《인생이 왜 짧은가》, 숲,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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