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는 이 하나 흔들리듯 황톳길 가에 박힌 돌 하나 발길에 차이고 차바퀴에 치여 앓고 있기에 빼주어야 할 것 같아 빼었더니 뿌리째 뽑힌 이빨의 흔적처럼 오랜 세월의 탯줄이 끊긴 자리 양수가 흐른 자리에서 알몸만 주물 鑄物 처럼 빠져나와 생의 거푸집 흔적만 선명히 남았구나 그의 빈자리 너무 무섭고 공허하여 자애로운 태양 아래 드러난 대지의 자궁 위에 고운 흙 뿌려 메워주고 장례도 치러주었다 돌이 들어있었던 자리처럼 커다란 공허함을 본 적이 있는가 .
시 달콤한 먹이를 먹으려면 쉼 없이 벌어야 한단다 분주한 꿀벌처럼 말이다 길가에 빨갛게 익어가는 산딸기도 달콤한 걸요 처음 가보는 길에 산딸기는 언제 또 보게 될지 알 수 없으니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만큼 많이 넣어야 한다 시든 딸기는 먹지 않을 거예요 풀숲 사이사이 빨갛게 익어가는 통통한 보석만을 입에 넣을 거예요 이 길의 끝이 어디든 드문드문 풀잎 사이에 뿌려진 햇살 머금은 반갑고 싱싱한 딸기가 수줍게 웃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내 눈길이 많이 분주하지만 않다면 말이에요 바쁜 일상에서 눈길이 분주해지면 감각이 둔해지고 시든 딸기를 먹게 된다. 버트란트 러셀은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게 되면서 남은 곡식을 저장하게 되었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면서 인간의 감각이 둔해졌다고 말한다. “문명인과 야만인의 중요한 차이점 하나가 있다. 문명인은 일을 많이 하는데, 일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미래의 즐거움을 확보하거나 미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그런다는 것이다. 이런 습성은 인간이 겨울철에 굶주리지 않기 위해 농사를 지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배고플 때만 식량을 구했다. 그 수단은 사냥이었는데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었다. 최종적인 이익을 위해 유쾌하지 않은 일을 하는 습성은 인간이 원시 상태로부터 멀리 떠나올수록 점점 자라났다. 목적 대신 수단을 위한 삶이 너무 지나치면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즐거움은 죽어버리고, 그럼으로써 미적 감각은 파괴된다.” 버트런드 러셀 저, 송은경 역, 《런던통신 1931-1935》, 사회평론, 2011.
남과 여가 있기에 사랑도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신이 인간의 힘이 막강하여 이를 견제하기 위해, 남녀 한 몸인 인간을 남과 여 둘로 나누어 놓았다고 한다. 결국 완전함이 불완전함이 되었기에, 완전함을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긍정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때 얼마나 행복한가. 모든 예술과 영화, 소설, 시 등 우리들 삶의 가장 큰 관심사가 남녀 간의 사랑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만들고,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남자가 갈비뼈 없이 어찌 살겠는가. 사랑은 결국 완전함을 위해 필연적이며, 자연의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여자는 남자가 쉬는 곳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골짜기와 같은 것이다. 골짜기는 가장 낮은 곳이므로 받아주지 않는 것이 없다. 동양에서는 음과 양이라는 것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한 인간을 왜 남과 여 둘로 나누었다고 하고, 성경에서는 왜 굳이 한 몸에서 갈비뼈를 취했으며, 동양 사상에서는 왜 음과 양으로 나누었을까. 고인 물은 썩는다.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기도 음극과 양극이 있어 흐르지 않는가. 세상을 변화와 역동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이 음과 양의 조화로 인한 흐름인 것이다. 공자가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도록 읽었다던 그 유명한 ‘주역’이란 책도 변화를 전제로 그에 대한 이치를 밝힌 책이다. 결국 세상의 근본 이치, 자연의 이치는 변화인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말을 남겼다.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물은 항상 흐르기 때문이다. 밝음 옆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있고, 낮 뒤에는 언제나 밤이 온다. 남자는 양이고, 밝음이고, 낮이며, 태양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늘이고, 밤이다. 한 낮의 뜨거움을 식히는 것이 밤이다. 남자(양)는 지칠줄 모르고 일만 하는 에너지이다. 쉬지 못하면, 스스로를 태울 것이다. 어둠(밤)이 식혀주어야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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