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처럼 차갑게 굳어 선 채 살점을 붉게 태우고 몸 그을려 검은 유골로 남았으니 이 가을 나무는 아름다운 풍장을 한다.
가지만이 선 굵은 농부의 고된 핏줄로 남아 너의 한 해도 적잖이 고달팠구나.
너의 비움으로 가을 잠자리 쉽게 내려앉고 까치집 하나 너그럽게 가슴에 품었으니 너의 욕망 욕심 들어낸 자리에 다가오는 겨울을 포근하게 품고 너의 사랑 마지막 한 잎까지 땅에 다 내어주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구나.
너의 껍질 거칠고 못난 중에도 작은 생명들에겐 깃들어 따스한 보금자리 되리니 한 생애 호미 쥐고 살아온 가지 많은 어매의 손등도 그러하였다.
어느 추운 겨울밤 내내 소리 없이 내린 눈송이를 실핏줄 따라 가지가지 듬뿍 받아 얹고 밤새워 고인 눈의 무게가 수차의 물처럼 흘러내려 그 적막한 아침을 깨우고 있다.
계절의 변화도 인간의 삶과 닮아있다. 봄에 피어나 힘차게 울어대는 여름의 매미(청년기)에서 이제는 인생의 쓸쓸한 가을을 맞게 되지만 화려한 꽃이 진 뒤에는 열매가 기다리듯 노년에는 또 다른 수확이 있고 깨달음이 있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인생은 삶과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서 비롯한 각자의 믿음과 신념이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백 년을 산 것보다 행복하다 할 것이다.
반야심경에는 삶과 죽음이 따로 없다는 이야기를 바다에 빗대어 말한다. 파도 알갱이 입장에서는 바위에 부딪쳐서 부서지면 죽음이지만, 바다 전체에서는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것이다. 제로섬이다. 동양의 고전 중용이라는 책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나무의 이파리가 시듦은 개별적인 죽음이 맞지만, 나무의 잎이 떨어져서 다시 거름이 되어 나무가 살아가기 때문에 나무 전체로서 본다면 삶과 죽음이 따로 없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개체로서의 삶은 죽음이 있지만 전체로서의 삶은 죽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과 나를 하나로 보고 사랑할 수 있는 최고의 깨달음을 알려준다. 공자가 말한 도는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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