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25의 게시물 표시

술의 기원 - 시와 단상

  위선으로 가득한 세상 태초에 인간은 자유민이었으리라 문명이 자유에 족쇄를 채운 오랜 역사 아침이면 습관처럼 우리 스스로 노예의 사슬을 묶고 무거운 발을 질질 끌며 황량한 사막을 낙타처럼 줄지어 , 오아시스가 있다는 신기루를 향하여 걸어온 그 오랜 역사   다행히도 술의 기원이 먼저였으니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하고 슬픔을 퍼올리며 기쁨으로 충만하여 용기를 돋우었으니 페르시아인들이 술을 마신 뒤에 중요한 일을 결정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옳으며 인간적인 일이다   그리하여 술을 마시고 인간은 다시 태초의 낙원으로 회귀하고 낙원에서 돌아온 자는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자를 개가 되었다고 비난한다 스스로 개가 되길 원했던 견유학파 철학자도 있었으니 개가 되는 것이 행복인지 인간이 되는 것이 행복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신은 인간에게 낙원을 엿볼 수 있는 도구를 주셨다 .

돌의 죽음 - 시와 단상

  앓는 이 하나 흔들리듯 황톳길 가에 박힌 돌 하나 발길에 차이고 차바퀴에 치여 앓고 있기에 빼주어야 할 것 같아 빼었더니 뿌리째 뽑힌 이빨의 흔적처럼 오랜 세월의 탯줄이 끊긴 자리 양수가 흐른 자리에서 알몸만 주물 鑄物 처럼 빠져나와 생의 거푸집 흔적만 선명히 남았구나 그의 빈자리 너무 무섭고 공허하여 자애로운 태양 아래 드러난 대지의 자궁 위에 고운 흙 뿌려 메워주고 장례도 치러주었다         돌이 들어있었던 자리처럼 커다란 공허함을 본 적이 있는가 .

어느 호숫가 - 시와 단상

  풀벌레 소리와 나무숨소리 들리는 곳으로 난  오솔길 따라 가면 보이는  작은 호숫가 뜰 위에 사람들이 몰래 시간을 떨구고 간다 강아지 재롱에 놀라 쫓겨온 아이 눈은 눈물을 떨구고 한 중년 사내의 고뇌와 한숨은  물속 그림자 위에 떨어진다 한낮 밝은 햇볕을 머금은 연인들의 장난 섞인 웃음소리는  물고기를 놀라게 하고  저녁 어스름에 찾아온 여인의 입가에 어린 쓸쓸함이  물고기와 입맞춤한다        이 호수와 함께 늙어간 노부부의 잘 떨어지지 않는 서툰 발길엔 쓸쓸함이 묻어간다      이들이 시간을 떨구고 간 땅 위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향기가 밴다      나의 추억이 떨어진 그곳에 그리움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호숫가 주변 풀밭에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이 향기처럼 배어있다.

러시아에서 만난 무명의 음악가 - 시와 단상

  상트페테르부르크 백야의 여름밤이 깊도록  맥주와 포도주를 다 비웠을 때  그가 배낭에서 압생트 한 병을 꺼냈지  고흐가 마셨다던 싸구려 독주  그로 인해 시신경이 파괴되었다고  그로부터 처음 들었지  우리에겐 더이상 마실 술이 없었고  그는 이 술을 권할 순 없다며  혼자 잔에 따라 마셨는데  그래도 좀 아쉬웠던지 한 잔 정도  마실 수 있냐며 권했을 때  이 술을 일상적으로 마셨을  빈센트 반 고흐를 생각하며  보드카보다 맑고 향기로웠을 그 마음을  우린 같이 따라 마셨지  고흐와 선술집에서 술을 마셨을 그들처럼  나는 한여름 페테르부르크의 한 외진 아파트  낡은 창가에 앉아 그와 술을 마셨네                        가난한 예술가의 삶과 그의 영혼에 건배.    

만유인력의 법칙 - 시와 단상

  대지大地는 봄에 꽃과 열매를 내어주고 다시 가을에 땅으로 거두어들인다 대지는 가을을 먹고 자라고 꽃들은 대지를 먹고 자란다 하늘에 살던 새도 결국 땅에 몸을 뉘우고 대양大洋을 가르는 고래도 해저 깊은 땅에 꼬리를 묻는다 땅은 모든 것을 실어주고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준다                 * 하늘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땅은 모든 것을 실어준다 : 장자의 글 인용       우주 안에서 삶과 죽음은 따로 없는 것이다.          

먹이 - 시와 단상

  어머니는 시간을 낳아주셨다 . 비싸게 팔리는 시간이 좋은 시간이라며 값 좋을 때 좋은 값에 시간을 팔아라 하셨다 . 팔리지 않는 시간들이 나에게 있었다 . 어머니는 팔리지 않는 시간을 나무라며 걱정을 하신다 .  어머니는 시간을 낳으셨고 그 시간을 팔아 나는 먹이를 먹었다 .     우리는 비싼 청춘을 헐값에 팔아 내일을 산다 .

목련 - 시와 단상

  설레는 이른 봄 내음과 함께 어느 날 아침 새하얀 블라우스 단정히 입고  맑고 청순하게 서 있던 너      벌써 계절의 상처를 누렇게 입고 엉성히 걸쳐진 옷처럼 툭 하고 떨어져 마음조차 놀라게 하는 너 짧은 봄이 가기도 전에 벌써 너의 볼륨 있던 몸매 굵은 뼈대만 남아  아직도 먼 겨울을 지나 또다른 짧은 봄을 기다리는가       짧았던 사랑 아쉬워 그립기만 했던 나의 연인아                목련은 순수의 시대 짧은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     

운명 - 시와 단상

봄날 미풍에 떨어져 바닥에 얹힌 꽃잎처럼 바람이 나를 이끌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운명이라 말했다. 방향을 모르던 그래서 바람이 나의 주인 되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 시절 바람은 무척 두려운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나의 두 눈이 한 방향에 가 닿았을 때 두 발 역시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바람은 더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이제 동풍에만 몸을 맡기기로 했고 운명은 나를 피해갔다. 언젠가는 서풍을 기다리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 다시 동풍은 나를 비껴갈 것이다. 나는 이제 스스로를 운명이라 부르기로 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