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바람 앞에 - 시와 단상

  바람 앞에 서라 시간보다도 빠른 바람 앞에 서라 날것의 언어로 속삭이는 바람 앞에 서라 그 앞에 서면 걱정도 고뇌도 휩쓸리는 티끌일 뿐 원시의 인간으로 바람 앞에 서라 한 움큼의 흙을 잡고 벼랑에 선 나무처럼 바람 앞에 서라 세월에 뿌리박은 바위의 의연함으로 바람 앞에 서라 바람 불어 내 의지와 고뇌 깃발처럼 나부낄지라도 적을 기다리는 성 위의 깃발처럼 당당하게 바람 앞에 서라 바람의 형상 그대로 받아 안아 휘날리는 깃발처럼 거짓 없는 몸짓으로 바람 앞에 서라       운명에 맞서는 자 , 바람 앞에 서라 .

바람 - 시와 단상

살랑대는 나무 가지와 흐느끼는 나뭇잎 사이로  나는 지나간다      때로는 파도를 일렁이고  하늘에 살아  흩날리는 눈발과 목적지를 같이하기도 하며 가을볕에 반짝이는 우듬지의 나뭇잎들을  속삭이게도 하는 나는 바람이다      여름의 숨 막히는 태양과 겨울의 눈보라도  나의 의지를 흔들지는 못했다       고고한 여인의 단아한 치맛자락도  함부로 날리고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나는 바람이다       새의 날갯짓에 아파하지 않고 그들의 날개에 스며 방향을 같이하는 나는 바람이다       한 잎 나뭇잎이 떨어질 때도 이리저리 몰아가며 한 줄 생각을 떨구게 하는 나는 바람이다      가을볕에 익어 떨어지는  빨간 나뭇잎에 향기를 입히는 나는 바람이다       그대 곁에 잠시 머물다 가는 그 흔적이 남지 않음에 아름다운 나는 바람이다 바람은 변화고 자유다.

바위 - 시와 단상

  시 고요한 바위의 뿌리는 멈춰버린 시간의 익사 얼마나 오래 너는 이곳에 있었는가 전혀 움직여 볼 기미를 보이지 않는 바위 무섭도록 적막하고 쓸쓸한 너는 언제나 그곳에서 비를 맞았고  들짐승들의 변함없는 보금자리도 되어 주었다 너에게 새로움이란 계절의 변화일 뿐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네 곁에 앉아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너는 계절의 영원한 배경으로  그곳에 머물러 있어라                          계절마다 나무도 옷을 갈아입고, 물도 때에 따라 늘고 준다. 늘 다니는 산에서 변함없이 본모습대로 자리를 지키는 것은 바위가 아닌가 한다.

배움에 대한 역설 - 시와 단상

  시 나는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어버린다      학문은 항문이다 소화되면 잊혀지고 배설되는 과식하면 탈도 많은 무가치한 것에 조차 가치를 부여하려 하는 인생의 좀벌레인지도 모른다      때론  순수를 악으로 여유로움을 죄악으로 본질을 무지함으로 돌리려는       무엇보다도 허무한  권태롭고도 위험한  시간의 함정일런지도 모른다                공자는 채우라 하고, 노자는 비우라 한다. 채워야 비울 수 있지 않을까.     

백야의 페테르부르크 - 시와 단상

  시 8월의 뜨거웠던 해가 지고도  하얗게 밝았던  페테르부르크의 그 신비로운 밤 우린 강가의 선상 카페에 올라  댄서들의 춤을 보며 맥주를 마셨지 시간을 알 수 없었던 늦은 밤 선미에서 강물에 떨어진 불빛을 바라보며  두 팔을 쓸쓸히 접어 난간에 기대고  담배 하나 피워 문 단정한 검은 연미복의 댄서와 만났는데 낮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고 밤엔 댄서로 일한다고 웃으며 피우지 못하는 담배 한 대를 권했을 때 그가 보여 줬던 멋진 춤 동작처럼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워 물고는  서로가 서툰 영어로  그냥 마냥 얘기하고 웃었지 그는 오늘 놀러 온 먼 시골 고향 친구들을 소개하겠다며 한 테이블로 이끌었고 낯선 동양인을 본 친구들은  러시아인 특유의 무뚝뚝하고  왠지 모를 불안과 경계의 표정을 지었는데 나를 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우린 모두 고향 친구가 되었네 그들 중 앞니가 몇 개 안 남은  유난히 선량해 보이는  직업이 농부라는 이 시골 친구는  자신의 여권 사진까지 보여주며  해맑게 웃었는데 하룻밤에도 친구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사실 여권이란 우리에게 너무 낯선 물건이었지 국가와 태어나 자란 곳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다시 헤어져 그날 밤 한바탕 웃음들은 추억으로만 간직한 채  한 번의 악수로 서로에게 온기를 전하고 그렇게 쉽게 쉽지 않은 이별을 했네 오래전 러시아인의 초대로 러시아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른 적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소박하고 낭만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들이 전쟁을 일으켰다고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전쟁은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일부 정치가들의 일일 뿐이다.  전쟁은 자신의 발에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했다. 전 세계가 다 같은 형제요 동포란 말이다. 우리는 모두 사랑의 ...

부평초 - 시와 단상

  시 그 어느 곳에서 내 의지는 뿌리째 뽑혀 부평초로 흘러 이 계절까지 떠내려 왔을까 유년이 갓 지난 첫사랑의 운명적 슬픔을 알고부터일까 별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반짝일 것 같던 순수와 흔히 선이라는 것 정의라던 것이 빛을 잃어버린 흐린 밤이었을까 너무나 커져버린 두려움이 스스로 신념을 뿌리째 뽑아 흐르는 물결에 맡겨 별다른 풍파 없이 거센 물결 거스르지 않아 꺾이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 강한 뿌리박고 물결을 온몸으로 버티고 막아선 그도 결국은 처참히 뽑혀 빠른 물살에 여울 따라 흘러갔으니  나보다도 빨리 떠나갔던 영혼을 잃어버린 힘 빠진 모습에 정의가 뿌리째 뽑히는 허무한 모습에 눈물을 흘려보기도 했지만 결과가 정의의 가치를 말해주진 않는 것  정의는 평가받아야 할 이유 없으니 홀로 신념의 뿌리로 우뚝 서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별은 스스로 하늘에 뿌리박고 반짝일 뿐 구름이 가리더라도 언제나  그곳에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신념으로 뿌리박고 물살이 세면 흔들리며 거센 물살에 묵은 때 씻고 물결 잔잔하면 뿌리 없이 흘러가는 내 분신들 손 맞잡고 같이 설 수 있으리 흐린 구름 뒤로 별은 항상 빛나고 있으니  삶은 신념으로 사는 것이 아닐까.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 신념, 믿음을 도로 빼앗는 것이 된다.' - 율곡 이이 <성학집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의탁할 자기의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의 마음속에 그리고 있는 자기의 세계에 충실하였느냐, 충실치 못했느냐가 늘 문제이다. 사람에게 가장 슬픈 일은 자기가 마음속에 의지하고 있는 세계를 잃어버렸을 때이다.'  - 헤겔 '수양에는 '오래'가 비결이다. 아무 효과가 있는 것 같지 않아도 믿고, 그 하는 일을 유일의 소득으로 알고 그저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도다. 길 가는 밖에 길이 따로 있고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그 마음, 그것이 곧 목적이요 수단이요 하는 자다.  '구즉통久卽通'이라, ...